1564.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3월 12일
지난 3월 초부터 다시 <장자> 함께 읽기를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두 시에 만나 <장자> 원문을 읽으며, 사는 이야기를 장자에 빗대어 말하며, 스스로 성찰한다. 어제는 제4편 인간세(人間世, 사람 사는 세상) 7-10절을 읽었다. 이 4편의 인간세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이 편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특히 복잡하고 비정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 기여(寄與)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心齋)'이다. 이 말은 사회나 정치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은둔주의나 도피주의가 아니다. 진정 건설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을 고치고 차원 높은 방도를 터득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숙한 성찰과 노력으로 시선의 높이를 올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함께 읽기를 마치면, 5-6의 키워드 뽑아 일상에서 실천하기로 정했다. 어제 읽은 부분에서 나는 6 가지 화두를 얻었다. (1) "단이허, 면이일(端而虛, 勉而一)" "단정하고 겸허하며 근면하고 오로지 하나에 전념 한다."는 말이다. 난 여기서 이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4가지라 이 거라고 생각한다. 단정, 겸손, 근면 그리고 일념(잡다하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거나 하는 일이 아님) (2) "일점지덕성(日漸之德成)"해야 대덕자(大德者)가 된다. "나날이 덕을 닦는 일"을 해야 "큰 덕"을 가진 사람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대덕 연구 단지'가 생각난다. (3)"집이불화(執而不化)" 고집 또는 집착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없다. 다르게 발하면 설득할 수 없다. 원래 문맥에서는 위 왕이 고집이 세서 꺾을 수 없다고 하는 문맥에서 가져온 것이다. (4) 삶의 세 가지 길을 보여준다. ① 하늘과 함께하는 삶=동자(동자, 어란아이)의 사람으로 "여천위도(與天爲道)"라 한다. ②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삶. 여인위도(與人爲道)라 했다. ③ "여고위도(與古爲道)"라고, 옛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5) "다정법(多政法)은 '불첩(不諜)'이다. "꾸밈이 너무 많아 좋지 않다"는 말이다. (6) 유사심자(猶師心者)는 "가이급화(可而及化)"하지 못한다. 오로지 가르치려는 흑심을 가진 자는 상대를 변화 시킬(설득할) 수 없다. 나는 감화력(感化力, 좋은 영향을 주어 생각이나 감정이 바람직하게 변화하도록 하는 힘)이란 말을 소환했다.
아침 사진은 몇 일전에 동네 공원의 산수유 꽃을 찍은 것이다.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이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며 봄에 꽃이 피는 순서가 없이 동시에 피면서 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이었는데, 올해는 비교적 위의 순서를 잘 따르는 듯하다. 지금은 산수유와 매화가 한창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못 나갔다, 아마도 이 비 그치면, 여러 꽃들의 봉우리가 막 터질 것이다. 코로나-19로 시간이 많아 고전을 꼼꼼하게 다시 읽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영혼이 살찌며 근육이 생기는 듯 하다. 오늘 시처럼, 꽃을 통해서도 허공을 읽고 싶다. 오늘의 화두는 '허(虛)'이다. 비우는 것이다.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당신과 내가 마주 보며 흔들려서 만들어낸
바람의 바깥, 저 허공의 언어가
꽃이라는 것은 영원히 당신과 나만이 알지
다시 또 <장자> 이야기를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최근에 우연히 만난 한 블로그에서 딱 떨어지는 주장 하나를 만났다. <장자>에 흐르는 하나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심과 사심을 버리고 허심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이 복잡하고 얽혀 있다할지라도, 지금-여기서 편안한 상태를 얻을 수 있는 ‘동어대통(同於大通,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됨)’의 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해지는 삶의 길인 가’를 중심으로 장자의 철학을 정리해보면, 북명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큰 새로 변신하여 남명을 향한 사유 여정에서 도달한 목적지가 ‘나 없음’(無己)이라는 것과 ‘나 없는 마음’(虛心) 앞에 현현하는 세계가 곧 ‘제물(濟物)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만물제동(萬物濟同, 만물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등가이다)인 ‘제물의 세계’는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대로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세계’라는 것이다. 따질 것 없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말이다. 다만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피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참가지로 내가 상대를 존중할 수 없다면 따로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
이런 만물제동, 즉 평등은 허심에서 비롯되며, 허심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인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는 더하기 공부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즉 해체 시키는 공부이다. 이 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성심에서 사심으로 가지 않고, 허심으로 가는 기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용선 선생의 블로그와 그의 멋진 책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에서 얻은 생각 갈무리 한 것이다.
(1) 허심을 위한 공부로 첫째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 것’과 ‘저 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 화 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 화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 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 는 일이다.
장자는 이를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이라고 했다. 피차, 즉 주체와 객체라는 말은는 기준으로 삼는 시각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의 구분에는 이미 시비 판단의 계기가 전제 되어 있다.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을 둘러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사심은 성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이라 했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 인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2) 허심을 위한 공부 둘째는 ‘시비를 화(和)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각기)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만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분별지)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시비’(和是非')는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3) 허심을 위한 세 번째 공부는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는 것이다.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 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부득이’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
(4) 허심을 위한 네 번째 공부는 각득기의(各得基意)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는 것이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이다. 장자의 기본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 하늘의 무지개라 표현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정)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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