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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수요일에 만나는 시대정신

1562. 인문운동가의 사진하나, 시하나

2021년 3월 10일

 

 

 

매주 수요일 아침은 시대정신을 이야기 한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의 양심 문제를 이야기 하고 싶다. <논어> 제17장 "양화" 2절에서 공자는 "오직 지극히 지식이 많은 자(上知)와 가장 어리석은 자인 하우(下愚)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길을 걷던 공자가 하루는 길 옆에서 똥을 싸는 사내를 봤다. 공자는 함께 있던 제자를 시켜 그 사내를 자신에게 데려오게 했다. “너는 짐승이 아닌 이상 어찌하여 가릴 것, 못 가릴 것 구분을 하지 못하느냐.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짐승이냐.” 공자는 힐난의 말과 함께 엄청나게 사내를 꾸짖었다. 그러자 사내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는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다시 순행(巡行) 길에 오른 공자. 이번엔 길 한가운데서 똥을 싸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난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공자는 화를 내기는 커녕 제자에게 그 사내를 피해서 가자고 말한다. 제자는 길 가운데서 똥을 싸는 저 사내가 더 나쁜 놈인데 왜 피해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길 옆에서 똥 싼 사내는 그나마 양심은 있어 가르치면 되지만 저 놈은 아예 양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하우불이(下愚不移)'의 교훈이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논어(語)>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글 앞에는 항상 '유상지여(唯上知與)'가 함께 붙는다. '하우'와 '상지'를 같은 등급으로 생각한다. 하우야 어리석고 못났으니, 받아들이지만, 상지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잘난 척하는 엘리들이다. 바뀌지 않는 사람의 예로 '상지(上知)', 즉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우수하고 총명한 사람을 짝처럼 붙여 놓은 것이 공자의 통찰력이다. 그럼 상지와 '하우(下愚·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는 왜 바뀌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났으니 그렇다 치고 못난 사람이 요지부동인 이유는 지레 포기하기 때문이다. <논어집주>에 따르면, 하우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포(自暴)'하고 '자기(自棄)'하는 사람이다. '자포'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사람, '자기'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엘리트라며 나만이 정의라는 확증 편향에 있는 자의 오만함, 그가 만들어낸 거짓에 놀아나는 우매함, 마치 종교 같은 믿음. 상지와 하우는 그래서 통하는 사이인가? <강원일보>의 오석기 문화체육부장의 글을 갈무리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국민이 힘들어 하는 데, 우리 사회를 더 아프게 하는 이들이 '상지(上知, 엘리트)가 아닐까? 난 우리 사회의 마지막 적폐가 "관피아"라고 본다. 사법부에 이어 이젠 공기업들이 적폐이다. 왜 그럴까? 그 답에 설득된 글이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의 것이다. 촛불 혁명 이후에 남은 과제가 적폐 관료들을 청산하는 일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정치는 지도자, 경쟁 체제, 돈, 조직을 잃었다. 물리력과 정치력의 시대가 끝나자 관료의 힘이 세지었다. 관료는 자기 부처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패권에 대한 자각'은 약하지만, '법'도 사실상 관료들이 만들고, 그 법이 실질적 효력을 갖게 하는 '시행령'도 그들이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패권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권이 있는 곳에 규제가 있고, 규제가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지만, "기업과 공무원, 그리고 로펌의 결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관피아'는 척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이 하나 더 등장했다. 법원, 헌법재판소, 검찰, 로펌을 포괄하는 법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 최후의 판단 자이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들이 직접 뽑은 정치적 권위에도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법적 권위에는 승복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그렇게 만들었다. 검찰과 법원의 정치적 공간은 정치가 그 공간을 버렸기 때문에 열린 것이다." 이젠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 우선 정당이 정당 다워야 한다. 지금은 야당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국민의 당은 정당이 아니다.

 

이번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광명, 시흥 신도시 투기 의혹이 터지자,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다)이라는 신조어에 빗대어, 이번에는 '영털(영혼까지 털렸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심이 사납다. 양심들이 없다. 가짜 농업계획서를 제출하여 농지를 매입하고, 비싸게 되 팔아 수십 억대의 매매차익을 남긴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농지법을 위반하여 재판을 받아도 결국 집행유예로 나온다. 관료들을 포함한 투기꾼들은 농사를 짓겠다고 했지만 이들의 진짜 속셈은 농지를 비싼 값에 되파는 것이다. 거기서 엄청남 불로소득을 얻게 된다. 내 주변에는 그 짓을 하고도 그게 자랑이라고 뽐내는 사람도 있다. 거래차익을 노리는 의도를 숨기고 관공서를 속여 농지를 샀다가 파는 투기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은 입법 활동에 더 매진해야 한다.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이번 사안에 적용할 수 있는 법이 부패방지법, 공공주택특별법, 농지법 그리고 한국토지주택공사법 등 4개 밖에 없다. 부패방지법도 이익을 실현하지 않아 적용하기 힘들고, 업무상 비밀도 해석의 범위가 분분하다. "비리를 저지른 공직자는 패가망신시킬것"이라고 말만 무성하지, 실질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이 부족하고, 대개 벌금이나 집행유예로 풀려 나오는 현실이다. 그래 오늘 아침은 아픈 시를 공유한다.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아침 사진의 매화 꽃 보고 그냥 웃어봐요, 자연은 말 없이 자기 할 일을 한다.

 

 

굴삭기의 향연/박주영

 

세차게 불어오는 삭풍

여윈 하늘가에 서 있는 구름

민 낯을 스쳐

아우성치는 나뭇가지들

물기빠진 마른 잎새가

추풍 낙엽 되어 대지를 뒹군다

 

산 그루터기 황토 흙 속

잡풀을 키우던 가시나무에 얽힌 사연

태고적 고요를 딛고 일어서서

시간의 무덤속으로 파고들어가

굴삭기 수레바퀴 흙을 털어내고

아기 밥 숟가락질 하 듯

커다란 쇠손으로 음률을 탄다

 

아수라장 같던 지난 날

틀에 박힌 삶을 잊으려

강한 곡선과 정직한 표정으로

흙과 한 몸으로 섞여

우지끈한 성격 다독거리고

 

산다는 건

사람에게 짓밟힐 때마다

마음 툭툭 털어내는 일이라고

거침없는 현실을 황토흙속에 묻고

아름다운 전율로 곧게 일어서서

퇴적된 흔적을 보듬는다

 

우리 사회에 가장 금한 일이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언젠가 배철현의 <매일 묵상>을 읽고 '양심'이란 주제로 갈무리했던 글을 오늘 아침 공유한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양심을 동양의 사유체계에서는 '무아(無我)"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무아, 내가 없음, 영어로 I'm nothing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는 절대계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나'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면, 그때부터 '욕심(欲心)' 세계가 시작된다.

 

경전들은 이 양심을 쨀램(tzelem), 프시케(psyche), 이마고(imago dei), 푸르샤(purusha), 아트만(atman), 신적인 불꽃(divine sparkle)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양심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소중하게 여기고, 갈고 닦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원석(原石)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 양심은 거친 자신을 응시하고, 버려야 할 자신을 절제하고 흠모할 만한 자신을 훈련할 때, 서서히 만들어지는 그 사람만의 개성(個性)을 만들어 주는 DNA이다.

 

인간은 자신의 양심의 존재를 모르거나 그것을 방치하면,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규율에 쉽게 복종한다. 그 이유는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남들이 다 그러기 때문이다. 아니면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인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소로(19세기 미국 사상가)의 말에 따르면, 단체(국가, cprporation)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국가)는 양심을 소유한다. 법은 결코 인간을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의 양심을 포기하고 국가의 법을 따릅니까? 저는 '인간(men)'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 누구의 종속을 받는 자(subject)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법에 대한 존경을 장려하는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라도 하는 것입니다."

 

숙고로 무장한 양심이 있는 시민들이 드문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에 눈이 먼 수많은 욕심쟁이들의 난장판일 뿐이다. 어쩔 수 없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개인의 양심이 전체주의 국가권력을 무너뜨릴 유일한 힘이라고 했다. 독재자들은 모두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힘을 신봉하고 이용하고 과시하였다. 독재 권력은 그래 개인들을 파편화 시키려고 애를 쓴다. 문제는 집단주의가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형이다. 집단이라는 용어는 허울만 존재하지 실제로는 수많은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한 금방 허물어질 어설픈 최소 공배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재할 때, 만들어지는 전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집단)을 장악하려는 소수가 한 사람, 한 사람 교묘하게 세뇌시킨다. 그러니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갈고 닦아 자립하는 인간으로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늑대를 따르는 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운명을 만날 것이다. 이 문제를 칼 융이 잘 말하였다. 그는 국가를 순응하는 양들의 모임이라고 진단하였다. 그 양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리더가 자신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융은 "목자들의 지팡이는 철퇴가 되고, 목자들은 늑대로 변질된다"고 경고하였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건강한 국가가 된다. 그래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자신의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며 친절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양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가 무식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행이 수치(羞恥)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오늘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