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 달에 다시 읽기 시작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40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 달에 다시 읽기 시작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한 장 넘기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저기’를 바라보고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지 않고 상대방이 사람이 아닌 허상을 떠올리고 말한다. 자신의 편견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데 안달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시한다. 그들에게 대화와 토론은 자화자찬의 전시장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창피주기 위한 격투 경기장이 된다. 그들의 머리는 항상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허상에 사로잡힌 장소인 ‘저기’에 홀려 있다. ‘저기’를 위해 ‘여기’를 어리석게 희생시킨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동물이, 사물이 ‘신(神)적’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신적인 존재는 항상 ‘여기’에 온전히 몰입한다. 내가 보는 모든 식물과 동물은 항상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어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유일하고 독특하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저 것’을 흉내 내고 부러워한다.
오래전 부터 나는 과학 기술의 중심인 대전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통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발전 모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염원과 자발적 실천을 목표로 모인 커뮤니티 <대덕몽>을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했다. 코로나-19로 그 모임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야외에서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래 아침 일찍 나갔다가, 10시 반경에 연구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 앞에 어제 주문한 책이 와 있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최근 시집이다. 제목은 <마음챙김의 시>이다. 그리고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읽고 "삶의 균형을 찾았다"고 하는 데이비드 부룩스(이경식 옮김)의 <두 번째 산>이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라는 표지 문장이 마음에 들어 주문했다.
류시화 시인은 시집 표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여러 색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아침 마다 시 한편을 공유하는 것이다. 당분간 이 시집의 시들을 공유할 계획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터키의 종교 지도자인 하룬 야히아의 시이다. 마침 어제, 늘 다니는 탄동천 산책길에서, 나는 나무에 한참 앉아 있는 새를 줌으로 잡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보며, 이 시를 택했다.
새와 나/하룬 야히아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세상 어느 곳으로도
날아갈 수 있으면서
새는 왜 항상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데미안>> 제1장의 제목은 "두 세계"이다. 화자는 경계에 있다. ‘여기'와 ‘저기'의 경계는 타부(taboo)이며 ‘현관(玄關)'이다. 이 경계에는 항상 괴물이 등장한다. 이 경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다. 그 괴물은 오랫동안 수련하고 준비하지 않은 자들을 과거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는 비극적인 인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고향 테베로 들어갈 참이다.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도시 성문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 스핑크스(Spinx)는 그리스어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 대상을) 목 졸라 줄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언젠가 읽은 혹은 들은 정보를 가지고 대답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노자가 이렇게 말했고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혹은 괴테가 이런 식으로 표현했고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노래했다.” 자신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의 반복은 진부(陳腐)하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썩은 고기의 악취일 뿐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를 받아 종종 죽임을 당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인용했는가? 노자가 도덕경을 들먹였는가? 셰익스피어는 단지 셰익스피어일 뿐이다. 괴테는 스스로 고민하고 인생의 해답을 나름대로 찾으려는 파우스트였다. 우리는 교육을 자신하고 상관없는 숫자와 정보를 암기하고 신속하게 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가진 핸드폰에 저장된 정보가, 서울시 전체 인구가 지닌 지식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 교육은 개인의 지닌 유일한 개성을 자극하는 체계다. 교육은 그 존재가 더욱더 그 존재 답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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