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0일)
1
산다는 것은 항해와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거다. 인생은 목적지에 맞게 잘 그려진 지도를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망망대해에 던져 진 채 밑도 끝도 없이 항해를 하는 것이다. 드넓은 바다에서 우리에게 맞는 길을 찾는 일은 평생 끝나지 않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파도와 폭풍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폭풍이 가득한 항해일지라도, 우리가 하기에 따라 의미 있고 즐거울 수 있다.
어제부터 이정민(데비 리)이라는 분의 책, <<인생의 폭풍 속에서 춤을>>을 읽고 있다. 그는 삶을 항해라고 보고, 다음 다섯 가지 항해 법을 이야기 한다.
- 배: '나'라는 배의 설계도를 이해하는 것
- 나침반: 내 인생의 나침반이 향하는 목적지를 발견하는 것
- 항로: '나'만의 항로, 즉 인생 지도를 그려가는 것
- 선원: 내 배의 선원들과 건강하게 함께 하는 법을 익히기
- 항구: 새로운 항해를 위한 회복의 시간인 항구를 갖기
오늘은 이 책이 말하는 첫 번째 항해 법으로 '나'라는 배를 이해하는 법을 정리하여 공유한다. 우선 흥미로운 장(챕터)의 제목들을 나열해 본다. 일상에 힘을 주는 문장으로 그 문장 자체가 좋다.
▪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내 배에는 진짜 이름이 붙는다.
▪ 세상에서 가장 아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존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느리고, 때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발견하는 작은 깨달음 하나하나가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인생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런 시도를 '정신을 차렸다' 혹은 '제 정신이다'라고 부른다. '제 정신'은 순수 한국어 '저의'의 준말 '제'와 '정신'의 합성어다. 우리가 자신의 정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혹은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타인의 이념, 철학, 교리, 가르침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 위에서 세운 집이다.
▪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를 만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버티는 일이 아니라, 생생한 기쁨이 된다.
▪ 제품이 아닌 명품이 되는 삶을 꿈꿔야 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가꿔온 사람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치를 품은, 대체 불가능한 명품 인간이 된다.
▪ 때마다 가장 아름답게 흐를 수 있는 속도가 있다. 서두름에 마음을 빼앗기보다, 여정 속에서 내게 필요한 걸 찾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짜 항해이다.
▪ 완벽하지 않아도 끝까지 버텨 지금까지 온 여정이 바로 용기이며 능력이다.
▪ 인생의 폭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든 작은 루틴들은, 삶의 물살이 거세질 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닻이 된다.
2
이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간다. 제 1장의 제목이 "배"이다. 인생이라는 항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배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배로 태어났을까?
▪ 바람과 파도를 천천히 가르며 수많은 사람을 태우는 여객선일까?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조용히 리듬을 맞춰 노를 저어가는 작은 나룻배일까?
▪ 바다의 숨결을 읽어 고기를 찾아가는 어선일까?
▪ 결정적 순간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는 스피드 보트일까?
중요한 것은 어떤 배가 더 귀하고 훌륭한 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배를 부러워 하며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내 배에는 오직 내 베에게만 허락된 기능과 속도, 그리고 목적이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비로소 나의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낳아 달라고 요청해서 세상에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어느 날 의식이 들고 보니 나라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1인칭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일은 판타지 소설이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니 우리 안에는 그런 열망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제각각 다르고, 그 환경을 내 힘으로 바꾸기는 몹시 어렵다. 특히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어린 시절이나 젊은 날에는 더욱 그렇다. 부모와 형제도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직장도 선택을 받아야 겨우 일할 수 있다. 주어진 삶이 모든 면에서 '금수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내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우리 인생의 비극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키를 잡아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 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세계 곳곳의 분쟁과 전쟁, 반목에 대해서 논평은 할 수 있지만, 그걸 내가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작고 작은 세상 만큼은 우리가 꿈꾸던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 그 길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만의 배를 만들고, 항로를 짜고, 나의 배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다.
3
'금수저'라는 말이 나오면, 이제 와 나이를 먹으니 그거 부러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수저', '부유한 상속자'로 태어나면, 갖지 못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이다.
▪ 영혼이 성숙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숙은 피, 땀, 눈물이라는 3가지 액체를 많이 흘리지 않고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격이 빈곤하다. '금수저'의 가정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되기 때문이다. 영성이 부족하다. 보통 우리는 돈이 좀 부족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자아를 덜어낼 수 있다. 그 순간 겸손해지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이 비움과 감사를 훈련하는 게 바로 영성이다. 그런데 '금수저'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 부모로부터 통제를 많이 받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의 독립을 갖지 못한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나 만의 독립적인 관점을 가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도 갖는다. 인생을 실패해 봐야만 완전한 제로 베이스에서 인생 출발을 한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주입된 관점에서는 창조를 못한다. 게다가 가문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야 할 규칙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진심은 그렇지 않다 해도 정중한 태도를 지켜야 하고,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절대로 따를 것도 규칙에 들어 있다. 이런 식이다.
▪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을 못 믿는다. 물질적, 신분적 풍요는 가식(假飾) 속에서 생활하기 쉽다. 그래서 재산을 물려받은 2, 3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의심병도 많다. 가식을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살면서 무척 경계심이 많다. 그래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출발 조건과 행복한 삶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 그 큰 유산을 가졌다면 걱정이 없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돈을 뜯길까 봐, 의심이 그의 머리에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 일을 하지 않아, 무 균실 안의 '금수저'들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사실 일은 인생을 설계할 때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느낌과 배움을 얻고, 도전에 맞서 성장하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자립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속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쓸모 있고 생산적인 존재라고 느껴야 성숙해진다. 그래 우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있다면, 돈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에서 의미 있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은 가족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독립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금수저', '부유한 상속자'들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제 삶은 그와 거리가 멀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하며 출발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이해를 따지지 않는 우정, 가족 간의 애정, 열정을 따르는 삶, 일상의 작은 행복 등, 행복의 진정한 비밀은 어떠한 시회계층에도 속해 있지 않다. 부자가 아니어도 가능하다. 너무 돈, 돈 할 필요 없다. 그리고 재산 때문에 일상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게 뭐가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4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외부의 유혹에 경도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인 '본심'이다. 본심은 성배와 같아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 수련할 때,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욕심'은 '과유불급'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처사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자신이 배부른지 알면서도 과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욕심(慾)이란 한자가 그렇다. 깊은 골짜기(谷)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欠)다 마셔보겠다는 마음(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이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본심'이다.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저 큰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마음, 참마음이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굴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은 이 본심을 정성스럽게 발굴하는 체계다. 이 본심은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와 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처럼 보편적이다. 이 보편적인 마음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는 '아함 브라흐마스미', 즉 '나는 우주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난다. 태어나서 하는 일이란, 배가 부르고 편하면 웃거나 자고 혹은 불편하거나 배고프면 우는 것이다. 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거나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장착된, 조상에게 물려받는 이기적인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비극 '필록텍테스'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여, 인간은 끊임없는 슬픔과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운명을 타고났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싸우는 세상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여기 역경과 고통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온, 자신의 본심을 발견한 이야기가 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소위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미리 요구하여, '먼 지방'에서 쾌락을 위해 산다. '먼 지방'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하는 '본향'과는 달리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해 살아남는 장소다. 그곳은 또한 권력과 돈,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싸움터다.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는 이곳에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위한 유혹이 난무한다. 쾌락은 이곳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이다. 성서는 작은아들이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재산'이란 원래 자신의 모습이며 존재다. 인간은 언젠가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는다. 가정이라는 위대한 공동체를 통해 사랑과 헌신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첨예하게 연마한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영적으로 빈사 상태가 되고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경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방탕하게 살았다'라는 표현은 육체적인 타락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본심의 고사 상태이기도 하다.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용서'라는 가치가 고갈되었다.
<누가복음>은 먼 곳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그것을 다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아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고통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는 나침반을 선물한다. 그 나침반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침묵'이다. 침묵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정적은 인간이 정신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다. 인류의 불행은 가만있지 못하는 안달에서 온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장시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에서 조용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또 다른 강렬함으로. 그것은 원대한 합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심오한 교섭을 위한 것입니다. 어둡고 차갑고 공허한 쓸쓸함을 통해 삶의 강렬함을 경험할 것입니다(We must be still and still moving Into another intensity For a further union, a deeper communion Through the dark cold and the empty desolation)."
엘리엇이 말한 '이 강렬한 순간'을 <누가복음> 15.17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그 자기-자신으로 돌아왔다." 탕자가 고통을 통해 그 자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본심이다. 그 본심은 자기-자신이다.
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빵과 물고기>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3)
물고기 낚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다음
지치고 굶주린 사람들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낚으라시며
남김없이 아낌없이
정성스럽게
나눠주라고
건네시던
빵과 물고기
사람 낚는 고운 꿈을 접고
그저 제 살 길을 찾아서
물고기 낚는 것마저 이
룰 수 없는 스스로에게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남지 않아 지치고 굶주린
끝까지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픈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벗들에게
건네시는
빵과 물고기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기쁘게 남김없이 받아먹고
다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온 누리 어딘가에서 여전히
지치고 굶주린 벗들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빵과 물고기
6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떠올려 보며 다시금 감사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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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10/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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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21장 1-14절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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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마음으로 하는 기억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우리가 영적 실망, 곧 영혼이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불안과 유혹, 슬픔과 절망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느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권고합니다. 그중 하나는 그와 반대되는 영적 위로의 시기, 곧 내적으로 평화로웠던 때에 내렸던 결정을 바꾸지 말고 항구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영적 실망의 때에는 유혹에 빠지기 쉬워, 선한 뜻으로 세웠던 결심을 포기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억’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는 은총의 체험들을 잊거나,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총의 순간을 기억하는 일은 영적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방황할 때 다시 돌아갈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가 곧바로 물에 뛰어든 것은 그때의 부르심이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그를 다시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와 같다면 좋겠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탁월한 방법 중 하나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기에, 비록 생각이 흐려져도 마음은 기억하는 법입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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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0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부활의 기쁨이 가득한 팔일 축제의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 장소가 꽤 의외입니다. 화려한 성전이나 숨어 지내던 다락방이 아닌, 그들이 본래 살아가던 평범한 삶의 터전인 티베리아스 호숫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부활을 체험했음에도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요한 21,3)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인간적인 허탈함이 묻어납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결과는 빈 그물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경험과 지식, 노력만을 믿고 밤낮으로 그물을 던지지만, 정작 아침이 밝았을 때 허무함만을 손에 쥐게 되는 영적인 빈 그물의 순간을 마주하곤 합니다.
날이 밝아올 무렵, 해변에 나타난 낯선 이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권합니다. 베테랑 어부들이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자기 고집을 꺾고 그 말씀에 순명했을 때 그물은 백쉰세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기적은 나의 능력이 출중할 때가 아니라,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의 방식에 따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라는 요한의 외침에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해변에서 제자들을 맞이한 것은 숯불 위에 놓인 따뜻한 생선과 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제자들을 꾸짖는 대신, 밤새 추위와 허기에 지친 그들을 위해 직접 아침 식사를 차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나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분이며, 지친 우리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라고 손을 내미시는 따뜻한 분입니다.
이 사랑의 체험은 베드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빈 그물을 보며 절망하던 어부가 어떻게 성전 경비병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이라고 외치는 반석과 같은 증인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호숫가에서 자신을 위해 아침을 차려주신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빈 그물‘처럼 느껴지십니까? 혹시 내 고집대로만 그물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이라는 호숫가에 서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만큼은 내 생각과 조금 다르더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차려주신 성찬의 식탁인 미사에서 새 힘을 얻으십시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세상 풍파 속에서도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그물을 가진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텅 빈 마음의 그물을 보소서. 당신의 말씀으로 채워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저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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