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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명은 연결에서 시작된다.

365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8일)

1
진달래는 ‘진’과 ‘달래’가 합쳐진 이름이다. 즉 ‘달래 꽃’을 가리키는데, 그보다 더 좋은 꽃이라 하여 ‘진’이 붙은 것이다. 달래는 '달려있다'는 뜻인지, '다래'의 달래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진달래는 먹을 수도 있고 약에도 쓸 수 있어 '참꽃'이라고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두견화(杜鵑花)'라 한다. 옛날 촉나라 임금 두우(杜宇)가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고, 두견새가 울면서 토한 피가 꽃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두견화'라고도 한다. 이 설화는 진달래의 꽃말인 ‘절제’와 관련이 깊다. 한방에서는 '두견화' 또는 '만산홍'이라 하여 꽃을 약으로 쓰는데, 혈액 순환을 활발하게 하여 기침, 고혈압, 월경 불순 등의 증상에 처방하였다.
 
우리나라에 '화전 놀이'라는 민속이 있었는데, 이는 진달래꽃이 만발한 3월 삼짇날 부녀자들이 진달래로 전을 부쳐 먹고 춤추며 노래하고 하루를 보내던 놀이이다. 이것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한, 진달래꽃이 두 번 피면 가을 날씨가 따뜻해 지고, 꽃이 여러 겹으로 피면 풍년이 든다고 믿기도 하였다. 진달래꽃으로 빚은 진달래 술은 봄철의 술로 사랑 받았다. 특히, 충남 당진의 면천 진달래 술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명성이 높다.
 
진달래는 오랜 시간 전국에 걸쳐 살고 있어서 인지 예술 작품부터 생활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다/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한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있고, 여기에 곡을 붙여 노래한 가요도 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이 마음도 피어~"로 시작되는 가곡도 많이 불린다.
 

진달래꽃/이진흥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온 몸 구석구석
오들오들 그리움이 피었습니다
 
가슴 속 관류하는 고통의 핏줄
바위틈에 숨겨진 화려한 절망들이
봄바람에 터져서 피었습니다
 
향기로운 당신 말씀 가혹하여
함부로 찢어져서 빠알갛게
온 산에 철철철 흘렀습니다

2
페친 민웅기의 담벼락을 늘 읽는다. 여기서 만난 화두이다. 우주는 전체적으로 퍼져 가고 있지만, 생명은 그 안에서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아마 그 현상이 가장 섬세하게 드러난 자리일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충동은 철학적 취향이라 기보다, 무질서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생명의 방향성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는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계를 이해 가능한 형태로 다시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하려는 마음, 이해하려는 노력, 깨어 있으려는 수행은 우리의 단순한 결심이라 기보다 우주적 자연 현상일지도 모른다. 흩어지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생명은 조용히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란 그 흐름이 스스로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순간의 이름이지 않을까?

생명은 연결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배치를 통해 연결이 되면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 그 연결이 치유하는 원리이다. 치유는 정교한 수술이나 강력한 화학 약품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 삶의 수많은 균열을 메우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사람이다. 그 원리를 민웅기는 다음과 같이 3 가지를 들어 설명한다. 공명, 신뢰 그리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큰 통찰을 얻었다. 이게 우주의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3
공명(resonance, 나는 공진화라고 본다): 내 주파수를 타인과 세상에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증폭되는 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는 '미러 뉴런(mirror neurons, 거울 신경계)'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내가 상대의 아픔을 진심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노파와 심장 박동은 함께 미세하게 동기화된다. 그래서 고립된 통증은 날카롭지만, 공유된 통증은 무뎌 진다는 말이 가능하다. "나도 그랬어". 혹은 "정말 힘들었겠다"라는 짧은 긍정의 한 마디는 상대의 뇌에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바로 이 안전한 연결감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그 사람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 이 얘기는 우리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키우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일깨운다. 나는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며 사는가. 악한 늑대는 증오의 눈물을 먹고 산다. 그 맛은 쓰고 짜다. 선한 늑대는 사랑의 눈물을 먹고 산다. 그 맛은 달다. 그러니 선한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자. 아니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악한 늑대에게도 기회를 주자. 악한 늑대를 선한 늑대로, 증오의 눈물을 사랑의 눈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내 안의 우물에서 울리는 공명의 근본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그 소리의 높낮이와 진폭에 따라 생각의 각도를 조절하고 행동의 방향을 바본다. 그러다 보면 남의 우물에서 울리는 소리도 들릴 것이다. 두 우물과 두 눈물이 만나 ‘공감의 강물'을 이루는 소리까지 들릴 것이다. 그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서로를 껴안고 흘러가는 것에서 시작해 보는 거다. 공감은 상대가 증오의 눈물로 고통스러워 할 때 그 깊은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 함께 울어주는 일이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쓰라린 지 헤아려 주는 일이다. 상대의 속사정이 어떤 지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런 배려가 곧 선한 마음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선한 행동이다. 

동사로 치면 ‘어루만지다'와 ‘보듬다’ ‘품다'와 같이 둥글고 품이 넓은 것이다. ‘어루만지다'는 부드럽게 쓰다듬어 만지는 것, ‘보듬다'와 ‘품다'는 가슴으로 품어 안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보듬고 어루만지며 젖을 먹이는 장면을 그려보자. 세상이 어둡고 세태가 엄혹할수록 공감과 사랑, 선한 마음, 넓은 품, 어둠을 밝히는 빛의 소중함이 커진다. 대립과 분열, 분노와 저주로 얼룩진 시대에는 서로를 어루만지는 선한 행동이 더 절실하다. 장발장이 주교 덕분에 ‘선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듯이 선함과 사랑은 암흑을 가르는 빛이고, 인생을 밝히는 등불이다. 그 빛으로 나와 타인의 발 밑을 함께 비출 줄 알아야 한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먼 길을 걸어 보라"고 했다.

두 번째로 사람이 서로 연결되려면, 사람 사이에서 신뢰가 시작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옥시토신, 신뢰의 호르몬이 나온다. 사람 사이의 따뜻한 눈맞춤,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진솔한 대화는 우리 몸 속에서 옥시토신(oxytocin)을 분비 시킨다.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이 물질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염증 반응을 완화한다.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넘어, 타인의 존재  자체가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고 신체적 회복을 돕는 생물학적 촉매제가 된다. 그래 우리는 서로 연결하여 조직할 때, 신트로피(생명의 질서)가 증가 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되려면, 세 번째로 이야기, 아니 서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야기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대개 '맥락'이 없을 때 더 파괴적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 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때 인간은 무너진다. 이때 누군가가 곁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행위는 혼란스러운 경험에 질서를 부여한다. 타인의 귀를 빌려 내 아픔을 언어 화하는 과정에서,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재앙에서 삶의 한 조각으로 재구성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치유는 바로 이 서사의 완성을 돕는 일이다.

치유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그 과거를 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함께'의 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치유의 원리는 대단한 기술에 있지 않다.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연결되는 것, 그 연결의 밀도가 곧 치유의 깊이를 결정한다.

다시 명상 이야기를 되 돌아 온다. 오늘 알게 된 임계점이라는 말이 기억된다. 임계 상태(균형 무질서와 질서 사이의, 엔트로피와 신트로피의 균형)에서 신경망은 아주 안정적이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해 진다. 이 균형점에서 뇌의 정보 처리와 학습, 반응 능력이 최적화 한다는 거다.

실험 결과 숙련된 명상가일수록 명상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휴식 중)의 뇌 신호 차이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장기간의 수련을 통해 명상 주에 나타나는 뇌의 유연성이 일상적인 뇌의 기본 값으로 정착했다는 것을 뜻한다. 불안이나 스트레스, 우울증 같은 질병에 대한 명상 요법이 인기를 끄는 것은 명상의 효과는 명상하는 동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예컨대 우울증의 경우 뇌의 유연성이 향상되면, 즉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과 관련한 뇌 회로의 활동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주의력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심리적 안녕의 핵심 기재인 자기 감정 조절 능력도 좋아진다. 명상은 주의 집중하는 능동적 상태이기 때문에 뇌 기능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안녕감을 높이고 스트레스와 울울 증상을 줄여준다.

4
사람은 살면서 사회, 즉 공동체와 상호 작용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 우리는 사회 자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자원은 개인의 삶에서 안전망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질병이나 인지기능 저하, 이동성 저하 등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자원은 개인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돌봄을 제공하는 주요 경로이기 때문이다. 다음 그림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사회와 상호 작용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은 의미로 '사회 자원'이라 한다. 위의 그림처럼 나의 사회자원을 통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나의 사회 활동은 어떤 가? 사회참여, 봉사활동, 직업활동, 종교활동 등을 나누어 다각도로 살펴 본다.
▪ 나의 사회적 일반 자원 상태는? 재정 상태, 주거 상태, 거주 환경 그리고 돌봄 자원 등을 다각도로 살펴 본다.
▪ 좁은 의미의 사회 자원 상태는? 결혼 상태, 가족과의 관계, 자손의 유무, 사회관계망,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 등을 다각도로 살펴 본다.

더 나이가 들어, 질병이나 인지기능저하, 이동성 저하 등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자원은 개인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돌봄을 제공하는 주요 경로가 되기 때문에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사람들은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얻는다. 이를 우리는 사회적 욕구라 하고, 진화로 만들어진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생명체는 뭉쳐서 조직화 되어야 생존율이 더 높아진다. 실제로 집단적 상호작용을 할 때 옥시토신, 세로토닌 등 행복감, 안녕감을 주는 화학물질의 움직임이 측정된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그림 처럼, 사회자원은 개체를 형성하는 복잡적응계의 구성요소이자 중요한 내재역량이다. 특히 집단적 관계가 만들어주는 정서적 안정감은 다른 도메인과도 연결된다. 노년기에 넓은 의미의 사회자원이 취약해지는 현상을 우리는 '사회적 노쇠'라 한다. 신체적 노쇠만큼, 이 사회적 노쇠도 우리들의 내재역량 전반을 감퇴 시킬 수 있다.

5
2026. 04. 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있어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부르니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따라서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잃고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버리고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없는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아닌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거슬러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만난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만난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몰라보고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알려주니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을 깨닫고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부르니
길을 걷는 사람들
길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길이 되어
길을 걷는 사람들

6
말씀과 성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감사합시다.
2026/4/8/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복음 24장 13-35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말씀과 성체: 은총의 원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가톨릭교회는 오늘 복음의 이 장면을,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사로 이해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7항 참조).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는 장면은 미사 중 말씀의 전례를 떠올리게 하고요. 성체성사는 단순히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성체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그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더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발길을 돌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러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갔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파견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라는 고백처럼,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을 일깨우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는 단순한 활자와 상징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은총의 원천입니다.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8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부활 팔일 축제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와, 부활의 능력이 구체적인 치유로 드러나는 베드로의 기적을 함께 마주합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등지고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꿈이 무너진 곳, 스승이 죽임을 당한 실패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바닥만 보고 걷느라,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실패, 이별, 고통과 같은 인생의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기쁠 때뿐만 아니라, 가장 낙담하여 힘없이 걷는 그 길 위에서도 우리와 보조를 맞춰 함께 걷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의 슬픔이 눈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닫힌 마음을 어떻게 여셨습니까? 먼저 성경을 풀이해 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탁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매일 참례하는 미사 전례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말씀 전례를 통해 차갑게 식은 마음을 데우고, 성찬 전례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미사 중에 평화를 느낀다면 이미 여러분 곁에 부활하신 주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성전 문 곁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은과 금 같은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근본적인 치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앉아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권능입니다. 이 시대는 은과 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본 즉시,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슬픔의 길을 내려갔던 그들이 이제 기쁨의 길을 뛰어 올라갑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이들의 변화입니다. 여러분을 주저앉게 만드는 ’절망의 문‘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선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식탁에 주님을 초대하십시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평범한 일상은 거룩한 성찬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성경 말씀 속에, 여러분이 모시는 성체 안에,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미는 따뜻한 손길 안에 살아 계십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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