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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위대한 개인 되기 (2)

질문의 힘이 인문학이다.

예수는 40일간의 묵상을 통해 자신만의 유일한 임무를 받는다. 그것을 우리는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 로마 식민지 시대에 사회 통념을 전복
-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담론(discours)은 권력자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조작한 지식이나 진리를 정당화하고자 만든 상식이다. 메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밝힌다.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점점 각 종교나 교리보다는 윤리적인 지침이나 영적인 훈련에 더 관심이 있다. (하비 콕스, <<신앙의 미래>>)

종교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생각해온 조직이나 교리보다,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행복을 느낀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하비 콕스가 말하는 종교의 3단계

1단계: 1-3세기의 신앙(faith)의 시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느냐가 중요했다.

2단계: 4-20세기의 믿음(Belief)의 시대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통치수단으로 삼으면서,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올바른 가르침’에 매몰되어 주도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하고, 근본주의의 세가 불어났다가, 최근에 위축되고 있다.

3단계: 영성의 시대
초대 그리스도교는 기도와 예배 그리고 자비의 행위를 강조한 영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동감 있는 조직이었다. 초기 교회에는 순교문화도 있었다. 그러나 4세기부터 정통 교리 논쟁에 휘말리면서 그 역동성을 잃고 교리라고 알려진 일련의 고백에 동의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재미없는 사상으로 굳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자생적이고 감동적인 모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다.

종교는 신비나 경외심 같은 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라기보다 교리나 개별 종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가르침‘이어야 한다. 종교를 통해 자신의 삶의 실체를 파악하며 변모시켜야 한다.

문제는 20세기 초에 등장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우주가 신의 말로써 한순간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단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그 신은 이 세상의 규칙적인 조화 안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행동에 관심 있는 신이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조절하는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그 만물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고 유지하는 ’내재적 신비‘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높은 차원의 지성은 자연, 본질 그리고 신이 합쳐진 삼라만상의 원칙이다. 이 원칙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미약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종교의 3단계: 인간심리의 세 단계를 종교의 진화를 통해 추적

1단계: 공포의 종교
공포에 의존하는 사회의 종교 유형

2단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신에 대한 관념의 종교. 인간들이 신을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 숭배한다. “사춘기 종교” 관념의 종교에서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다.

3단계: “우주적인 종교 감정”, 이것은 자연과 사상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숭고함과 놀라운 질서를 인식하는 감정이다.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사제나 종교 단체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도덕적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되고, 삼라만상에 숨겨진 신비를 찾는 탐구를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다.

어쨌든 종교의 핵심은 “경와 존경심”이다.

과학적인 경외심도 종교이다. 숭고한 감정도 종교이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신앙 혹은 우주의 법칙에 대한 경외를 말하는 것이다. 어린이가 도서관에 가 그 책에 기록된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루돌프 오토(Rudolf Otto), <성스러움의 의미>

성스러움=거룩=누미노제(numinose)
거룩함은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는 말이다.

모든 죄, 특히 교만과 무질서를 피하는 것, 여기서 겸손과 안정이 나온다.

누미노제는 비이성적이며 인간의 오감과 자아를 뛰어넘는 신성에 대한 경험이나 실현이다.

# 누멘(Numen): 신의 행위
라틴어 ’신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단계여서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을 통해 표현하는 은유나 직유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오토는 누미노제를 ’신비‘라고 정의한다. 라틴어로 ’미스테리움(mysterium)’인 신비는 “절대타자‘에 대한 경험이다. 여기서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전율(戰慄, tremendum): 두려움으로 인하여 몸이 벌벌 떨림.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감격스러운 경우도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황홀, 짜릿함, 등

매혹(魅惑, fascinosum, fascination): 남의 마음을 호려 현혹되게 함;

이 순간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간직했던 세계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인간은 미스테리움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에게 전혀 생소한 절대적인 타자가 될 수 있다.

# 신비와 전율을 통해 체득하는 힘을 ’카리스마‘라고 한다.

charisma(카리스마)의 원래 뜻이 경외와 겸손을 경험한 자에게 내려오는 ’(신의) 선물’이다.

사전적 의미는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이다. 그러나 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절대적인 권위, 신의 은총을 뜻하는 그리스어 ’kharisma’에서 유래하였다.

#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 절대타자의 경지를 경험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결론: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스스로에게 맡겨진 미션을 찾도록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는 것이다.

# 예수의 첫 질문은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이다.

예수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예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신앙은 분명한 해답이 아니라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관과 신앙관의 끊임없는 파괴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과감한 여행이고 동시에 그 과정에 대한 한없는 의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를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종교와 성서를 이해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