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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유는 절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음'이 아니다.

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6일)

자유(自由)라는 말은, 서양으로부터 freedom, liberty 등이 소개되자 이들의 번역어로 선택되었다. “스스로(自)” “말미암다(由)”로 구성된 자유라는 말은,
1. ‘속박됨이 없음’의  'freedom'과
2. ‘억압에서 벗어남’의 'liberty(해방)'의 개념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내가 알고 있는 자유, 즉 “스스로 말미암는다"고 함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간섭 받거나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자유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뜻의 자주(自主)나 “스스로 세운 규율에 따라 행한다”는 뜻의 자율(自律) 등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자율이 “무율(無律)”, 곧 규율 없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자주가 “나 자신의 주인이라고 하여 남을 부릴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 또한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는 절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음'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혼동한다. 자율이 '스스로 세운 규율을 자발적으로 지킴'인 것처럼, 자주가 타인도 그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전제 아래 자신의 주인됨을 실현 함인 것처럼, 자유도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유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의 자유다. 자기에게만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누구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개인이나 한 집단에만 허용된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는 거다. 그러나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알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우리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를 꾸리고 사는 한, "자유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다. 예컨대 자유는 그 소산(所産, 어떤 행위나 상황 따위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당 화된다. 자유의 결과가 일탈과 탈법이고, 그것의 소산이 자기만의 또는 자기와 연관된 이들만의 누림이고 군림이라면 이는 어느 한 자락도 정당화될 수 없다." 김월회 교수의 탁월한 지적이다.

"하여 전근대시기 한자권에서의 자유는 “자득(自得)”이나 “자적(自適)”, 곧 스스로 충족된 상태의 실현 같은 내면의 수양과 긴밀히 연관되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자유인은 법이라는 한 가지에 복종한다. 노예는 법과 주인이라는 두 가지에 복종한다”와 같은 준칙이 공유되고 있었다. 또한 자유는 진실, 평화, 관용, 공공선 같은 가치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자신이나 일부만을 위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자유민주적’ 제 가치가 기본인 여기가 아니라 무인도에 가서 살면 된다." 현정권이 주장 하는 자유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지 모르겠다. 자유와 자유주의는 다르게 봐야 한다. 뭐든지 '주의'가 되면 이념이 된다. 사실 따뜻해 보이는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차가운 자본주의의 외양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자유주의라는 단어에서 일체의 낭만주의적 열정을 읽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는 돈을 가진 사람이 그 돈을 아주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이념에 지나지 않다. 마음껏 소비할 수 없다면, 엄청난 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보수주의자의 정직한 속내인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이 있는 그대로 인정되는 사회, 나아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이 원활하게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 가능한 사회만을 꿈꾼다.

그리스 사회는 자유민과 노예라는 확실히 구분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 사회에서 리더란 자유인으로 불리는 '능동적 시민'을 말했다. 피지배 계급으로서 자유가 없던 수동적인 노예들을 선도하고 끌고 나아가던 지배 계급이다. 자유인들이 지시하고, 노예들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자유는 평등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실질적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잡아 먹힐 자유와 잡아먹을 자유만 있을 뿐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다.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다. 물론 모두가 다 같이 평등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고장 난 저울 같은 사회는 기회부터 불평등하다. 그러면 결과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평등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 거듭 말한다. 윤 태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편협한 극우적 이념과 닮았다. 냉전시대의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자유란 단어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대통령이라면 극단적인 이념에 치우치거나 편협한 의미로 자유를 입에 올리면 안 된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기준이어야 한다.

헌법에 나오는 자유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고"히 한다 거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신체의 자유, 거주와 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인권을 확인하는 것들이다. 공권력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음이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윤이 말하는 식의 자유는 헌법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헌법 전문과 제4조에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얼핏 비슷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때 말하는 질서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세력이 말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 헌법이 규정하는 ‘질서’도 권력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지배’라는 말도, 법률로 국민을 다스린다는 게 아니라, 권력자나 권력 기관을 법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주권자의 의지의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집권 세력은 국민이 정부의 지침을 잘 따르며 질서 정연하게 살길 바라겠지만, 이런 식의 질서는 국민에게 강요할 수 없는 무례이며, 자체로 인권 침해다.

“자유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자유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방치된다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받게 됩니다 .”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강조했던 35번의 자유 중에 포함된 내용이다. 미국에 가서도 46번이나 외쳤고 , 올 광복절에서도 16번이나 ‘자유’를 얘기했다.

그리고 갖가지 형태의 자유가 목도됐다. 명품을 선물로 받을 자유, 외국에 나가서 쇼핑을 즐길 자유, 내 집 가까이 고속도로를 뚫을 자유,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술 파티를 벌일 자유. 그리고 말 잘 듣는 이에게 혜택을 주고, 정적이나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붙일 자유, 특검을 거부할 자유 등등. 누군가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데 사회적 책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떠한 제재도 없다. 말로만 자유, 진정한 ‘보편적 가치’의 실종이다.

이런 차원에서, ‘김건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과 ‘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검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는 그럴 자유가 없다.  헌법적 권한을 남용한 거다.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위해 공정하게 국정과 사법을 운영해야 한다.

자유를 사유할 때마다 소환되는 시를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푸른 하늘을/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 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자기 인식을 토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려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로부터 필요한 것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적게 가지며 욕심을 양심으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가난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살자는 것뿐이다. 적게 가졌다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려면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 근육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많이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은 자동차가 제자리에서 공회전을 하듯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기름만 태우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느라 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이가 아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일상을 방해 받을 정도로 지나치지 말자는 것이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해방을 맛본다. 해방(解放)을 프랑스어로 하면 리베라씨옹(liberation)이다. 이 말은 Liberer(자유로워지다)에서 나온 거다. 거꾸로 "해방은 자유에 의해서만 종결된다." 자유에 의해 종결되지 못한 해방은 차이를 만들지 못한 반복일 뿐일 수 있다. 차이로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지 못하면 지루한 삶은 계속된다. 해방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내려놓는 자유에 대한 체험을 만끽하기까지는 종결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해서 약속을 지키고 약속에 대한 중압감에서 훌훌 벗어나는 것이 해방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체험이다. 평소 즐겨 읽는 윤정구 교수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서 내 생각을 읽었다.

새장에 벗어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새장에서 벗어난 것을 자유로 알고 떠난 사람의 절반은 다시 새장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근력이 진정한 자유를 선사한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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