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23일)

2021년 연말은 코로나-19의 팬데믹 현상으로 우리들의 일상이 무너졌다. 송연회 자체가 사라졌다. 좀 나아지는 듯 했으나, 연말이 되면서 더 극성이다. 그래 오늘 아침은 침대에서 이젠 '일상의 순례자'로 살기를 다짐했다. 김기석 목사의 <<일상의 순례자>>란 책을 잘 읽은 적이 있다. 그도, 나처럼, 글을 쓰며 일상을 순례한다고 했다. '일상의 순례'라고 말할 때, '순례(巡禮)'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상의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참배함"이다.  왜 그런 거룩한 장소를 찾아다닐까? 그 이유는 다양하다. 초자연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감사를 표시하거나, 고행을 하기 위해서, 헌신을 위해서 등의 여러 가지 동기를 가지고 순례한다. 또 다른 순례자의 정의가 있다.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 본향(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눈 사람"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노마드적 삶이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적인 삶을 사는 거다. 노마드는 초원에서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을 뜻한다. 들뢰즈가 썼던 용어이다. 노마드의 생활 철학을 '노마디즘'이라 한다.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쓰인다.

순례자는 순례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구도자(求道者)로 본다.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던져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앎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求道者)가 되는 거다.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어떤 점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이끌어가는 건 질문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좀비가 된다. 노인은 '꼰대'가 된다. 꼰대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반생명, 즉 생명과 완전히 반대이다. 반복되는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한 가지 더 잘 구분하고 분류하며, 알아간다.

자신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람은 감동 그 자체다. 그는 무엇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치장하지 않는다. 요란한 치장은 부담스러운 옷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진부하고 천하고 공허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내면의 공허를 외면의 요란으로 감추려는 열등감이다. 이런 시끄러운 열등이 우월이라고 광고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은 영웅적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자는 구도자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안다. 그곳을 향해 그 누구의 눈치로 보지 않고 정진한다. 그는 마치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 개울물에 방해란 없다. 커다란 바위, 작은 나무, 약간의 늪지대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에게 유일한 길이다. 이것들은 개울물을 정화시켜주고 속도를 북돋아 주는 도움일 뿐이다.

내가 말하는 순례자의 길은 타인들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만나고,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길이다. 오늘도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 공간을 만나고, 거기서 오는 낯섦, 설렘 그리고 충격들이 일어나가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순례자이고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하다. 가치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철학은 내 행동과 일상과의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유행에 휩쓸려서 뭘 하게 되면 금방 식어 버린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이든 인생이든 뭔가를 바꾸려면 관점이나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래 나는 매일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쓴다. 이 글쓰기는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그 시대와 어떻게 만났는지를 돌아보려는 시도이다. 그래 내 일상을 순례로 생각한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내게 일상의 모든 순간은 벗어나야 할 질곡이 아니라, 나를 하나의 중심으로 이끄는 구심력을 이끄는 동력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시처럼, "다행이다."누구를 가르치거나 교화 시키려는 목표는 애당초에 없었다. 당신의 상황이 내 영혼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는지를 돌아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다 "내가 먼저 베였다."


다행이다/함순례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가운데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였다

조용한 목요일 아침이다. 그래 지난 여름에  모아 두었던 글 중에 강남순 교수의 것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이사회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변경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여기서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판단 기준은 경제 부분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 분야와 같이 수치화할 수 있는 '보이는 가치'의 성과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수치화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치'의 지속적인 심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지나쳐온 인간적 가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 가치라는 말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래 나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쓰는 거다. 올해도 오늘까지 잘 실천하고 있다. <인문 일기>를 통해, 이러한 인간적 가치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상기하고 가꾸고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생존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강남순 교수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다음의 다섯 가지 가치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크게 동의하고, 강 교수의 주장을 공유하며, 다시 한 번 코로나-19의 강제된 거리두기로 하잔하고 조용한 연말에 생각해 본다. 코로나 사태로 겪으며, 잃어버렸던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는 거다. 코로나로 뉴-노멀의 일상을 보내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소중한 가치를 다시 회복하자는 거다. 사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손길들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름'을 받아들이고 '함께'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1) 존중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이 가치는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타자를 나와 평등한 "동료 인간"으로 생각하며 존중하는 것이다.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의 도료 인간이다. 동료 인간으로서 타자들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그들 모두 나와 함께 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2) 인내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여기서 인내는 기다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개입하면서 우리는 종종 나 자신의 기대나 방식과 다른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즉각적으로 실망을 표현한다. 타자만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무수한 실망은 좌절감으로 이어진다. 자신과 타자에 대해 인내하는 것은 기다려 주고,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듯 삶의 방식 각기 다르다. 나의 기대나 기준을 절대화하고 싶은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다름을 받아들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서로 발걸음 속도를 조정하면서 걷듯, '함께'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3) 정직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팬데믹 위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야기되는 불안감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세계에 도사린 다층적인 감정들과 씨름해야 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우울과 불안을 일컫는 '코로나 블루',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분노를 일컫는 '코로나 레드', 장기화된 코로나19로 인한 깊은 좌절과 절망을 일컫는 '코로나 블랙'까지 등장했다. 두려움, 불안감, 슬픔, 비탄과 상실 등은 인간 보편의 감정들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서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사람들도 사실상 내면에는 이러한 감정과 힘들게 씨름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과 연결된 타자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직의 가치를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4) 친절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것은 거창한 명제나 행동만이 아니다. 친절과 같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백화점 직원들이 손님에게 보이는 인위적 감정 노동으로서의 친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가지는 배려이며,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자를 향한 고마움의 미소와 몸짓이다.

(5) 연민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연민은 동정과는 다르다. 동정은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물론 누군 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을 받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위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형성한다. 동정을 받는 사람은 '어쨌든' 존재의 사다리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보다는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긍휼은 가엾게 여겨서 도움을 주는 거다. 이 단어 속에서도 '위계'가 보인다. 그러나 연민은 '함께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의 아픔과 상실에 함께하고,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연대하게 된다. 연민의 가치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종류의 윤리적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 가가 겪은 아픔이나 어려움이 '왜' 생기는가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넘어서기 위해 다층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조용한 연말에 다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또한 서로에게 이러한 가치를 상기시키면서 이 가치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지켜내야 한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정치, 과학 또는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외부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변화만으로 우리의 삶의 질이 자동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우리의 내면 세계를 구성하는 가치들은 돈이나 과학으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가치가 활성화되고 작동되는 사회에서 비로소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며 보다 행복한 삶의 여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길은 경제와 테크놀로지와 같이 보이는 가치의 발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가 사회에 확산되어 자리잡게 될 때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함순례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순례자 #선진국 #존중 #인내 #정직 #친절 #연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