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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21일)

지난 달부터 매주 화요일은 서울 강의 여행을 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10시 반에 나가, 신탄진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영등포에 내려, 목동에 있는 양천구 평생교육원에서 <와인, 인문학으로 풀다>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오늘이 벌써 예정된 6주 강의의 마지막 날이다. 신탄진까지는 딸이 차로 데려가주고, 집에 올 때는 시내 버스를 타고 온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하는 쉽지 않은 여행을 한다. 그러나 늘 크게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하루 서울에 다녀 오면 몸은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숨을 쉰다.

오늘 아침 화두는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온다. 말 그대로 하면, '길은 다님으로써 만들어진다'가 된다. 원래 길이라는 것은 처음 한 명이 지나가고, 그 한 명이 또 다니고, 다른 사람도 그 흔적으로 또 가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장자식으로 '도는 행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도'라는 게 어차피 '말로는 못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려면 행동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다닌다'는 행위, 즉 실천이라는 행위가 핵심이다. 고민만 해서는, 말만 해서는, 길이든, 도든 영영 이룰 수 없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이 많아서', '나중에 욕먹을까 봐', '다른 게 더 좋아 보여서' 등등 일 수 있다. 한 스님에게 제자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습니까?" "닦지" "어떻게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거 남들도 다 하는데요?" "아니지. 남들은 밥 먹을 때 잡생각하고, 잠잘 때 오만 고민에 빠지지." 밥 먹을 때는 밥 맛있게 먹는 게 잘사는 거다. 잠잘 때는 잠 잘 자는 게 잘 사는 거다. 일할 때는 일만 하는 게 잘 사는 거다. 확실하지도 않은 내일 일을 걱정하느라 당장 잠을 못 이룰 필요 없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금은 소금도 아니고, 황금도 아니고 지금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다. 어찌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현재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늘 고민만 많이 하는 자신의 주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너무 많이 따지고, 계산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배고픈 당나귀가 있었다. 그때 주인이 정확히 같은 거리에, 정확히 같은 양의 여물을 정반대 방향에 갔다 줬다. 배고 고파 한 발짝이라도 덜 걷고 싶었던 당나귀는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지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당나귀는 고민만 하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조르바 이야기를 좀 더 해 본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를 다시 기억해 낸다. 나는 두렵지 않다. 최근에 이유 없는 어떤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데, 무엇 때문일까? 아마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더 내려놓고,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그리고 여기서 현재를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또 다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살던 삶에서 답을 찾는다.

(1) 조르바처럼, ‘지금 가진 것'과 ‘앞으로 가져야할 것'을 구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 하며, 최대한 그것에 만족해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다가 죽으면 된다. 무엇이 두려운가? ‘앞으로 가져야할 것'에 욕망하지 않는다. 지금 가지지 못한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기 때문이다.

(2) 남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삶들과 비교하면, 나는 나를 주눅들게 한다. 나는 나이고,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주눅들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3) 어떤 일을 할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뒤에서 잡아 줄 끈을 끊어야 한다.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줄(끈)을 자를 수 없다. (...) 그 줄을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살 맛이 없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거는 삶은 멋지다. 그러다 죽는 것이다. 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 아닌가!

(4)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 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겠 소?” 조르바가 말한다. 너무 많이 따지고, 계산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

(5) 조르바는 육체, 자신의 몸뚱아리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어떤 일이든 몸으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몸을 두려워한다. 죽으면 그만인데. 몸이 약하다고, 힘이 없다고 주저하지 말고, 육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이 걷고 산에 가고 주말 농장에서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같은 서생(書生)들에게는 체력을 잃으면 안 된다. 많이 걷고,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좀 덜 마시고, 덜 먹었으면 하는데 잘 안된다. 조르바에게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몸뚱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그 일에만 집중한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6) 조르바의 우정은 서로를 향한 조건 없는 존중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는 상대방을 ‘내가 아닌 모든 것'이라고 보고 대한다. 상대를 대하는 중요한 태도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 최고의 우정이다. 다시 새겨본다.

(7) 조르바에게서 이것도 배웠다. 인간(특히 우리 시대의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지성 아니 지식이 아니라 감성이고, 관념이나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고, 경건함이 아니라 관능이다. 시스템(이성)의 통제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폴론의 합리성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광란이다. 가끔씩 디오니소스(박카스)를 모시고, 이성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껴보아야 한다. 조르바는 세상의 논리로 보면, ‘나쁜 남자'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선행 밖에 모르는 완전함’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마음 깊은 곳의 선의(善意)에서 우러나온다.

(8) 조르바는 사람을, 그리고 예술과 자연을 사랑한다. 특히 사람을 사랑한다. 어느 누구나, 나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나도 그렇다. 사람은 다 똑같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구나 때가 되면 죽어 땅에 묻히고 구더기 밥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이다.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된다.

(9) 조르바는 모든 것을 마치 ‘태어나 처음'인 것처럼 느끼고 바라본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감동한다. 물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훨씬 더 자유로워진다. 고요한 물처럼,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면, '세상이 다 돌아간다(반환)'는 이치를 깨닫는다. 잘 나간다고 좋아할 것 없다. 곧 내려가야 할 테니. 일이 잘 안된다고 걱정할 일 없다. 떨어지면 반드시 올라가는 것이 우주의 진리이니까. 문제는 이 진리, 즉 반대의 힘으로 끌려간다는, 어려운 말로 "반자도지동"은 심란하거나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 그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0)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파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속에는 해방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 가가 시작되는 느낌의 해방을 엿볼 수 있다. 억압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지나치게 믿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 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이렇게 열가지를 나열해 보니, 마음이 처분해지는 아침이다. 사는 게 흔들릴 때마다 나는 이 10개의 답을 소환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정호승 시인의 <우정>이다. 사는 건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느냐 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는 건 소유가 아니라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노후대책은 관계와 현장의 활동이다. 한 평생을 직장과 핵가족에서만 산 사람은 은퇴 후 힘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돈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걸로는 해결이 안 된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관계와 활동이다. 계속되고 부지런한 활동은 예전의 끈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노후 대책은 관계와 현장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이다.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속에서 같이 읽고 쓰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스토리들이 확장될 수 있다.

우정 - 정호승

내 가슴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글씨 하나 있다
과수원을 하는 경숙이 집에 놀러갔다가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배의 가슴에다
머리핀으로 가늘고 조그맣게 쓴 글씨

맑은 햇살에
둥글게 둥글게 배가 커질 때마다
커다랗게 자란 글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 그래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사람마다 살아온 경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거나 주입하려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니까 말이다. 이런 가운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그를 매우 반갑게 생각하고, 그와 음모를 꾸민다. 그래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 몰래 꾸미는 일)'라고 말했다. 이 음모의 시작은 서로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하며, 뭉클한 위로를 받을 때가 공감하는 순간이다. 음모를 한국어 사전에서는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밈 또는 그런 꾀"로 정의하지만, 고 신영복 교수는 음모를 "현실에서 든든한 공감의 진지(陣地)"라고 말하면서, 음모란 우정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정의를 소개하였다. 슬픈 현실은 우리 주변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소외시키는 여러 벽들이 있다는 거다.

소통(疏通)이란 말의 뜻이 소외(疏外)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疏)의 뜻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소외는 트임을 막는 것이라면, 소통은 트임이 뚫리는 것을 말한다.  소통과 소외는 그런 차이를 보인다. 소통이란 그러니까 소(疏)를 극복(通)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말을 다 공감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심지어 사물들과 우정으로 소통을 하려면, 나는 일상에서 이렇게 실천한다.
1.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새로운 공부에의 도전을 용기내어 꾸준히 실천한다.
2. (우리가 음식물 쓰레기 최고의 나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대중음식점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빈 용기를 가지고 다닌다. 재활용 가능한 음식 쓰레기는 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3. (tv에서 외국인이 하는 말을 듣고) 대중 식당에서 사용한 휴지는 내 주머니에 챙겨간다. 내 코를 푼 휴지는 내가 스스로 휴지통에 버리자는 것이다.
4. (소고기 1Kg를 생산하는데 곡물 7Kg가 소비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채식주의를 실천한다.
5. (CO2가 기후변화의 주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BMW(자전거, 지하철, 걷기) 이용, 이-메일을 쌓아두지 않고 바로 지우기를 실천한다.  

각성이 체화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 실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뇌과학이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진행된단다. 각성(알아차림, 깸, 물듬) →기억(뇌의 자동적인 활동)→실천(가슴의 활동)→효과확인→되먹임기억→축적(습관, 안목)→탁월한 시선(삶의 시선)→선진문화→선진국→지구촌 경영으로 지구적 삶을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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