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25일)
주여 어디로 임(臨)하셨나이까? 여기서 '임(臨)'은 접근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대체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 혹은 신령이 강림하는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예수가 오신 날이다. 이를 우리는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Christ’와 ‘Mas’라는 말이 합성된 말이다. Christ는 그리스도, 즉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의미하는 헬라어 크리스토스(Cristo)를 의미하고, Mas는 라틴어의 Mass에서 나온 말인데 이 mass라는 말은 경배, 또는 예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즉, Christmas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하고 예배 하는 날이란 의미이다.
왜 'Christmas'를 'X-mas'라고도 표기할까? 'X'는 '그리스도'의 뜻인 그리스어 'Χ ριοτδξ(크리스토스)'의
머리글자 이다. 이것을 영어 철자로 바꾸면 'Christos'가 된다. 즉, 'X'는 영어의 알파벳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뜻하는 영어 'Christ'의 'C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X-mas'를 '엑스 마스'라고 읽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12월에 접어들며 맨해튼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이 가득하건만, 뉴요커들은 웬만해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무신론자나 타신교자가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만큼, 종교색이 짙은 표현인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같은 가치중립적 표현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서다. 이는 성, 인종, 약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를 자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의 여파기도 하다. 연말 홀리데이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외에도 유대교 축제인 '하누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축제인 '콴자' 등이 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날이다. 태초부터 계셨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 이었다. 하느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이며 복음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멈추고, 우리 다 함께 시를 한 편 읽는다. 황금찬 시인의 <거룩한 밤에>이다. 이 시를 읽으며 다짐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의 양치기처럼 별을 보고,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리라.
거룩한 밤에/황금찬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그저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어린 양의 무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조용히 조용히 뒤척이고 있는
그 소리뿐이었다.
그때 홀연히
하늘 저쪽 끝에서
별이 하나 눈부시게 빛을 흘리며
이쪽으로 이쪽으로 떠오고 있었다.
누구도 그 빛나는 별을 못 보았고
오직 들판에서 양을 지키던
늙은 양치기가 홀로 그 이상한 별을
보고 있었다.
별은 늙은 양치기 머리 위에 와서
멈추고 가지 않는다.
그 환한 빛은 들판을 밝히고
점점 그 찬란한 빛의 파문이
누리를 덮어 가고 있었다.
늙은 양치기는 놀라 소리쳤다.
무슨 하늘의 뜻입니까.
밝혀 주시오.
광명 속에서 천사의 얼굴이 나타나서
베들레헴으로 가라.
오늘 그곳에 인간 구원의 예수님이
오시었느니라.
하늘의 뭇별들이 눈을 뜨고
땅의 생명들이 영광을 얻어
저 바다 너머 그곳
땅의 끝까지 구원의 은혜 내리다.
예수여!
이 고요한 밤에 이름지어진 땅에
그리고 사람의 마음 마음에
몇 번이나 오셨습니까.
언제나 당신은 아기의 모습
그 하늘의 미소 바다 같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 진정 몇 번이나
오셨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하늘에는 주술사들의 삿된 주문이 떠돌고, 땅에는 음모의 살기가 자욱하다. 더욱이 거룩한 날에도 친위쿠데타를 옹호하는 무리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저들이 감히 십자가를 들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계엄령 선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고 악을 쓰고 있다. 전쟁과 폭력을 선동하는 사탄을 향해 그저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십자가 군병’이 될 수 없건만 저들은 알지 못한다. 어쩌다 그리스도교가 아스팔트 위로 끌려 나와 극우세력의 뒷배가 되었을까? 이상한 것은 이런 포악한 행태를 다른 교회들(특히 대형교회)이 방관하고 있다는 거다. 긴 침묵은 암묵적 동조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교회들이 숨기는 게 참 많고, 결국 그들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서를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는 목사들을 떠올린다. 저들은 권력과 야합하고, 교회 개혁을 방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다. 신도들에게 정치색을 끼얹고 그들을 내세워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 신도들마저 팔아먹는 셈이다.
유년 시절 예배당은 누추해도 정갈했다. 작아서 그 속에 들면 누구도 주눅 들지 않았다. 어머니들은 사연 하나씩 품고 새벽마다 교회에 모였다. 사연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예배당 안은 고요해서 아침 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머니들이 돌아가면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주 조용한 눈물방울들. 햇살도 그 눈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순수였다. 그 눈물이 세상을 지켜주었다. 그 눈물로 나라와 민족이 굳건해 졌다. 그래서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 기도의 힘이며, 기독교가 일조했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는 금식할 때면 머리를 빗어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했다. 기도 또한 골방에서 하라고 일렀다. 한데 가난한 기도가 사라져가고 있다. 통성기도가 잦아지고 있다. 함께 울다가 일제히 그친다. 목사는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된다고 소리친다. 예수가 언제 잘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더럽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번듯한 성전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떡과 포도주 한잔을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요즘 신도들은 헌금과 통성기도가 쌓였으니 천당이 예약되었다고 믿는다.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안팎의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다.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미래를 창조하였다. 복음서 저자들은 희망을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별에서 찾았다. 이 별은 고개를 가만히 들고 드넓은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조용히 찾으려는 소수에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이 별을 발견한 자를 '동방박사'라고 소개한다. 동방박사는 머나먼 땅 페르시아에 거주하면서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섬기는 사제인 '마기'(Magi)들이었다. 마기들은 한글 성경에는 동방박사로 번역됐다. '마술사'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magician'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별의 움직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던 '마기'들은 밤하늘에 등장한 커다란 별을 보고 유대까지 왔다. 이들이 별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 궁궐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동네의 누추한 마구간이었다.
'메시아'라는 희망을 발견한 사람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종교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또 다른 부류는 들판에서 양떼와 잠을 자던 목동들이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목동들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인도해 초원으로 가서 풀을 뜯어 먹게 하고 시냇가로 인도해 물을 먹이는 노동자다. 목동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고유한 의무를 묵묵히 완수하는 자다. 그는 양떼를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며, 양을 치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자다.
목동들은 어느 날 양떼를 방목하다 집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양떼와 함께 들판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고요한 한밤중에 목동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근처에서 이들을 공격해 물고 가려는 늑대와 여우와 같은 야생동물 때문이다. 목동들은 쌔근쌔근 잠을 자는 양떼 위를 환하게 비추는 큰 별을 봤다. 그 큰 별들이 목동들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다.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복음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라 일상의 생계를 위해 묵묵하게 일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정의로움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환전상들의 책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어버렸다. 돈에 오염된 무리를 꾸짖었다.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이러한 예수의 의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고, 그래서 복만을 받자고 한다. 아마도 신도들의 비판 의식을 일깨울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려면 의롭게 싸우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지려 하니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희생은 싫고 저항은 무서운 거다. 당연히 설교 속에 ‘의로운 저항’이 줄어들고 있다. 대신 세속화의 따가운 시선을 신비주의로 희석시키고 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굶주리는 곳에, 불의에 의해 신음하는 곳에 살아있다.
예수의 길을 걸으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수를 따르는 기쁨보다 교회 안에서 느끼는 절망감이 더 커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이 부흥시켰다고 교회를 자식에게 통째 물려주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교단 발전에 공이 크다며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자도 있다. 성전을 사유화하고, 자신을 예수 반열에 올리는 목회자들에겐 가난한 이들이 보일 리 없다. 그들 마음속엔 이미 거대한 바벨탑이 솟아 있다. 성전이 호화로울수록, 제단이 기름질수록, 찬양이 우렁찰수록 가난한 자들이 들어설 공간은 줄어든다. 우리 교회 목사가 영과 육에 살이 올라 뒤뚱거리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봐야 한다. 가난해서 쫓겨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이다.
그래도 오늘은 우리 모두 '하늘에는 영광, 땅위에는 평화, 나에게는 사랑'.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성탄과 희망을 되찾았으면 한다. 희망이란 절망을 처절하게 경험한 인간들이 피워내는 불씨다. 희망이란 가치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상을 저버리지 않고 작동시키려는 엔진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희망이다. 그 노래가 '아베 마리아'이다. 끊임없는 물음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결코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 (시인 박노해) 희망이란 절망을 처절하게 경험한 인간들이 피워내는 불씨다. 희망이란 가치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상을 저버리지 않고 작동시키려는 엔진이다. 인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춥고 배고픈 육체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삶이 무의미하며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체념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고 시기, 질투, 그리고 상대방의 불행을 통해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위안하며 지낸다. 희망의 별이 책이나 논쟁에서 발견될 리가 없다. 그 희망의 별은 고개를 숙이고 발 아래 땅만 쳐다보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려는 이기적인 인간이 볼 수 없는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고개를 높이 들고 밤하늘에서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 별은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빛나는 별이다. 희망이란 가축 먹이통 구유와 같이 자신의 일상에서 가장 흔한 것에서 발굴되는 보석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상을 지속가능 하도록 계속 잘 유지하는 자에게 희망이 보인다.
나는 희망한다. 너희도 희망하라. Sepera, spero! 코로나-19는 잡힐 것이다. 주어진 일상에 우선 최선을 다하고, 방역의 삶에 충실 하라. 나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 나는 숨 쉬는 동안 희망은 있다('Dum spiro, spero). 우리 모두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오지 않았는가?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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