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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 반 고흐의 예술적 여정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19일)

어제는 '고된' 목포 여행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서울에 갔다. 오랜만이었다. 사)한국치매예방협회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사전 행사로 회원들과 함께 <반 고흐전>을 관람했다. 주제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 반 고흐의 예술적 여정'을 조명하는 거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림을 편하게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함께 간 문혜련 화백의 도움으로 몇 개의 좋은 문장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887년 여름)" 나를 구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질문해 보았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1888년 10월 24일) 사실 먼 이 한국 땅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러 오는 이가 이렇게 많을 줄 알았을까?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1878녀 11월 15일)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 중에 글쓰기도 있다. 더 열심히 <인문 일지> 를 써야 할 이유를 찾았다.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이 작열하는 진실이다." 앙토냉 아르토가 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그 전시회가 실망스러웠는데, 그만 그것을 과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걸 후회한다. 노자가 했다는 말,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정(無正)'을 말하였다. <<도덕경>> 제58장 이야기이다.

"其無正(기무정) :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란 없다. 그러니 정답은 없는 거다.
正復爲奇(정복위기) 善復爲妖(선복위요): 올바름이 변하여 그른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요망한 것이 된다. 지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답이  되고, 지금 좋다고 하는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이 된다.
人之迷(인지미) 其日固久(기일고구):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 원리를 모르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이 오래되었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廉而不劌(염이불귀) 直而不肆(직이불사) 光而不燿(광이불요):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나도 자르지 않고, 날카로워도 벼리지 않고(예리하나 찌르지 않고), 곧지만 너무 뻗어 나가지는 않고(정직하나 뽐내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빛이 나나 눈부시지 않다)."

노자를 읽으면서, 내 일상에 적용하고 싶은 말이 "무정(無正)"이다. 정답은 없다. 그러니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함부로 지적하거나 훈계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랑한다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간섭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노자는 정답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답을 갖고 사는 세상을 원했다.

혼돈의 세상이 질서의 세상으로 변하자 세상은 정답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답은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의 삶에 하나의 질서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지금 세상이 혼란하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일상이 버겁다. 돌아가는 대로 살자.

정답이라는 질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구속한다. 종교, 이념, 윤리, 도덕 같은 것으로 개인에게 정답을 요구하기도 하고, 애국, 충성, 효도, 예절 같은 것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그리고 민족, 인종, 출신, 지역 같은 모습으로 변신 했었고, 훈계, 지시, 주의 같은 형식으로 인간의 개인적 삶에 부단히 끼어들어 간섭하였다. 노자는 이런 질서의 세계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짓밟고 무너트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질서라는 가면을 쓰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적 권력이었다.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도구로만 기능해야 한다. 공기와 물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부쟁(不爭)의 덕을 발휘할 때 비로소 권력은 영원히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에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

노자 <<도덕경>> 81장의 첫 단어는 도(道)이고 마지막 단어는 부쟁(不爭)이다. <<도덕경>>을 딱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도위부쟁(道爲不爭)", 도란 싸우지 않는 것이다. 노자에게 '도'란 평화다. 그 길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 '무위(無爲, '억지로'나 '일부러' 하지 않기)'하기에 다투지 않고,
▪ 자연을 닮아 너그럽기에 다투지 않고,
▪ 비우기에 다투지 않고,
▪ 소유를 주장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몸을 앞세우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자랑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화목하기에 다투지 않고,
▪ 검소하기에 다투지 않고,
▪ 편가르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강해지려 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만족할 줄 알기에 다투지 않고,
▪ 어린아이를 닮기에 다투지 않고,
▪ 겸손하기에 다투지 않고,
▪ 일을 꾸미지 않기에 다투지 않는다.

권력의 강화와 영토의 확장을 위하여 더 큰 질서를 요구하던 시대에게 노자는 개인의 자유와 평범한 일상의 회복이라는 '인문학적' 이슈를 던졌던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야 할 당위성이 있으며, 어떤 권력도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 제80장에서 자신의 이상적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이고, 내가 사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고, 내가 즐기는 오늘의 일상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소국과민(小國寡民, 나라를 적게 하고 주민의 수를 적게 한다)의 세상을 제시했다. 왕은 권력은 가지고 있으나 통치하지 않고, 방어력은 갖고 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문명의 도구는 있으나 그 도구에 인간이 종속 당하지 않는 그런 평화의 세상을 노자는 꿈꾸었다.

세상에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앞 글자를 따면 '정·비·공'이다.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고, 공짜가 없다. 어느 개그맨 유행어 중 '소는 누가 키우나'가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선 소를 키울 사람은 없고 소를 잡아 나눠 주겠다는 정치인들과 포크를 들고 소고기를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만 있다. 공짜 소고기는 이 세상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요즈음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한 사람을 보고, '구차(苟且)'란 말을 소환했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 이는 떳떳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좀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버젓하지 않거나 번듯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구저(苟菹)라는 말에서 나온 거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저(菹, 채소 절임 저) 자에서 풀 초가 빠지고 차(且, 버금 차)로 바뀐 것이라 한다. '구저'란 신발 바닥에 까는 지푸라기를 말하는 것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의인을 살리기 위해 천리 길을 가는 그의 신발이 닮아서 발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나 애처로워 볏짚을 모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 이 일을 보고 사람들은 모멸을 감수하고 적은 동정을 받는다 뜻으로 "구저 구저" 하다가, 세월이 흘러 '구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굶어 죽어도 구차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구차함이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요즈음의 정치인들을 보면 구차하다. 한 세상 당당하게 살고 싶으면, 구차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재물 앞에 놓였을 때 올바른 방법이 아니면 구차하게 얻지 말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마라. 다투게 되어도 이기려 하지 말고, 재물을 나누어도 많이 얻으려 하지 말라" 고대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었던 규범들을 실은 <<예기>>에 나오는 글이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흉터>이다. 아침 사진은 목표 여행 중에 갯벌에서 만난 거다. 그리고 반 고흐 전시회 포스터이다.

흉터/네이이라 와히드(얼굴 없는 시인으로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시인)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노자의 이어지는 말을 다시 읽어 본다. 타인들을 만났을 때 기억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廉而不劌(염이불귀) 直而不肆(직이불사) 光而不燿(광이불요):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나도 자르지 않고, 날카로워도 벼리지 않고(예리하나 찌르지 않고), 곧지만 너무 뻗어 나가지는 않고(정직하나 뽐내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빛이 나나 눈부시지 않다)."

도올 김용욕 교수의 번역도 좋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처신해야 한다는 거다.
▪ 方而不割(방이불할): 방정하면서도 자신의 방정함에 타인을 억지로 귀속시키지 아니하고,
▪ 廉而不劌(염이불귀): 날카로우리만큼 청렴하면서도 타인을 상해하지 아니하며,
▪ 直而不肆(직이불사): 내면이 곧으면서도 제멋대로 주장하지 아니하며,
▪ 光而不燿(광이불요): 빛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밖으로 눈부신 광채를 발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반듯하다고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고, 우리가 청렴하다고 타인을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직하다고 타인을 비방해서는 안 되고, 우리에게 빛이 있다고 타인의 눈을 부시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다 권력을 무차별하게 행사하면 그 피해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독재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선한 행위은 선한 결과로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유리하고 좋다고 결과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잘 나갈 때 겸손해야 한다. 행복이 다가올 때 경계해야 한다. 높이 올랐을 때 몸을 낮춰야 한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행복 뒤에 숨어 있는 불행을, 불행 뒤에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정답은 없다. 지금을 살면서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노자는 빛(光)으로 우리들의 처신을 강조한다. '빛을 줄여 세상의 눈높이에 맞춰라'는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빛으로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하지 말라'는 "광이불요(光而不耀)", '너의 빛을 사용하여 원래 빛으로 돌아가'는 "용기광복귀기명(用其光復歸其明)"으로 말하였다. 눈이 부신 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은은한 빛으로 모여든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눈부신 빛을 발하지 않는다는 거다. 2024년 연말에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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