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2월 6일)
오늘 아침 사진은 내가 늘 다니는 한 학원의 창문이다.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행복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의 글에서 만난 다음 문장이 소환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복일 수 있다.'
사실 요즈음 시절이 심난 하여, 행복하기보다는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겨우 산다. 그러나 하루하루 충실히 견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억지로 희망을 가지려 하지만, 현실은 어둡다. 그 어두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기후위기,
- 전쟁과 바이러스,
- 경기침체,
- -잔혹 범죄.
- 정치하는 이들의 무법, 무도
지금 이 순간에도 공들여 일궈온 일상을 뒤흔드는 불온한 사건들에 세상이 떠들썩하다. 운 좋게 비껴간 불행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비단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재난과 비극에 작은 행복조차도 잎을 틔우기 쉽지 않다. 도덕의 자리를 꿰찬 배금주의와 법률 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는 날 선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여기다 먹구름을 드리우는 사건들까지 연일 이어지니 보통의 날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만히 내 일상을 보면,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거다. 나는 누군가의 행복일 수 있다. 이 학원의 창문처럼 말이다. 그래 다음 2 가지를 마음에 새겼다.
- 각박한 세상살이를 버티게 하는 그들의 행복이 나라는 것에 대한 감사하자.
-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저 내가 나를 돌보며 안녕한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 - 이 마음이 각박한 세상살이를 버티게 하는 다른 이들의 행복이 나일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자.
나 자신에게 국한했던 폐곡선을 벗어나야 한다. 폐곡선(閉曲線)이란 곡선 위의 한 점이 한 방향으로 움직여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곡선이다. 폐곡선을 탈피하여 나 자신을 확장 시켜야 한다. 건너가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 될 때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일상에서 다음 말을 자주 하자.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라서 행복해.’ 시를 한 편 읽는다.
행복한 사람들은/이영지
행복한 사람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 둘씩 모이어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 불과
어깨사이에 늘 있는 나란한 바람으로
어깨를 두릅니다
날씨가 다소 쌀쌀해 지면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물과 태양이 결실하는
가을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먹습니다
달 밝은 밤
작은 언덕에 올라
마음을 담굽니다
마음의 단맛이 밭길에서 쑤욱 돋아나
가슴이 둥근 달로 걷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연말이 가기 전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다시 읽고 싶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느끼는 가장 비참함은 작품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투쟁이 더 비참한 것은 이른바 ‘갑’(甲)과 ’을’(乙)의 싸움이 아닌 ‘을’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작품 1부에서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미혼모(팡틴)를 시기와 질투 속에 일하는 공장에서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같은 공장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우리가 너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여인은 결국 사회의 어두운 바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소설에서 나온 동명의 뮤지컬 1부의 끝에 나오는 곡의 제목이 “Who am I?”(나는 누구인가?)이다. 가석방 기간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성공한 사업가이자 시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주인공 장발장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며 부르는 노래다. 정직함과 자신이 지금까지 거짓 신분으로 이뤄 온 삶의 성과들 사이에서 장발장은 고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내가 다시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신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오래전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희망을 주셨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분은 나에게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재판정에 나가 자신이 장발장이고 죄수번호 ‘24601’이라고 외치며 자백한다. 장발장이 이렇게 정직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19년간이나 가둔 감옥과 무거운 세상의 법이 아닌 그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따뜻한 마음을 베푼 미리엘 주교의 사랑 때문이었다.
수녀님 누나가 보내주신 조명연 마태오 신부의 글에서 읽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을 가져오려는 악의 세력들이 득실하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내년 총선거만 생각한다. 이 세력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그 길은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뿐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 생각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 짓지 말고, 나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상대를 좀 피하는 거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영혼으로는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 됨의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일상에서 그 상대의 장점을 바라볼 때는 돋보기를 보듯이 크게 보고, 단점을 바라볼 때는 망원경을 거꾸로 보듯이 작게 봐야 한다.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나는 "난득호도(難得糊塗), 흘휴시복(吃虧是福)"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뜻은 '어리숙하게 보이기가 가장 어렵고, 손해 보는 것이 곧 복이'라는 거다. 수시로 난 일상에서 '난득호도'를 가슴에 품고 산다. 똑똑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기는 더욱 어렵다. 똑똑하면 꼭 똑똑한 티를 내고, 매사 똑똑한 체하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상태는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척 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겸손하여야 한다는 뜻이고, 물과 같이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대화는 실종되고, 논쟁만 있게 된다.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득호도가 절실하다.
그리고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흘휴시복'을 꺼내 쓴다. 살다 보면, 입장이 바꾸게 마련이다. 서로 베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의미이다. 이득을 보는 사람은 즐겁고, 손해 보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다. 서로 윈-윈이다. 조금 손해를 봐서 어리석게 보인다면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복을 부르는 것이다. 당장 손해를 보는 듯 보여도 멀리 보면 손해 랄 것도 없다. 비워야 얻을 수 있고 비워 두어야 비로소 채울 수 있다. 지는 것이 나중에 이기는 것이다. 싹쓸이나 궤멸을 추구 하다 가는 역풍을 맞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리석음을 선택하여 양보하고 촌스러움, 겸허함 등의 태도는 화를 피하고, 복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해를 보는 것이 복이다는 하나의 삶의 지혜이다.
살다 보면 입장과 상황이 바뀐다는 진리는 노자 <<도덕경>을 정독하고 얻은 거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아시아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이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 돌아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말이 많지만, 늘 기억하는 것은 "위도일손"이다. 비움을 강조하고 있는 <<도덕경>> 제48장에 나온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원문은 이렇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여기서 내가 또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그 비우는 일은, 하늘(하느님, 도, 우주의 원리)을 바라보며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가는 거다. 성경에 나오는 말로 하면, 하느님 뜻을 바라보며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떤 시련과 고통의 걸림돌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된다.
조명연 신부는 이렇게 질문한다. 눈앞의 현실은 보지 않고 뜬구름 잡기식의 삶을 살고 있는가? 전혀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없다.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 없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님 뜻에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 과연 구원은 얻을 수 있을까?
순자가 말한 "적토성산(積土成山)"("권학편")이라는 말을 여기서 소환한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산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노자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건 지적인 게으름일 뿐이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제된 행동과 학교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感)'에 맡겨 해버린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꿈을 꾸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꿈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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