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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피와 눈물로 이루어 낸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6일)

분노를 정복하는 것은 겸손과 자비심이며, 악독한 마음을 정복하는 것은 선함과 지혜이다. (법구경) 이 말에 따라, 오늘의 화두는 겸손, 자비심 그리고 선함과 지혜이다.

선함, 더 나아가 선행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가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예언자 미가가 알려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내가 만난 신이 요구한 대로 생활하는 것이다."(<미가서> 6:8) 이 길이 분노와 악독한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이를 요약하면,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다. 예언자 미가의 이 말은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행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tob)'인데, 이 말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라는 선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인향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매너,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 가를 묻는 일이다. 고대 히브리어에 ‘선’이란 단어는 ‘토브’טוֹב인데 그 본래 의미는 ‘향기 나는’이란 의미다.  반면에 히브리어로 ‘악’이란 단어는 ‘라’רַע인데, 그 의미는 ‘악취가 나는’이다.

'토브'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번 돈의 양이 곧 자신의 인격이자 실력이라고 착각한다. 부를 관장하는 운명의 여신은 부의 편중을 싫어한다. 자신이 부를 쥐었다면, 자신보다 운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 부가 자신에게 좀 오래 머물 뿐이다. 착각하며 정해진 순간을 사는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선행(善行)이다. 고전 히브리어로 '토브(tob)'는 구약성서에서 올리브 기름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종종 등장한다. 그러니까 토브는 그 기름이 최상급인지 아닌지는 향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최고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나 또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반찬의 향기와 맛이 '토브'이다. 그리고 '토브'는 위대한 성악가의 아름다운 목소리이며, 예술가의 조각이나 회화, 대자연의 장관을 형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선(善)은 아름다움이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것이다. 여기서 진선미(眞善美)가 다 만난다.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짐승 인간에게서 사람 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 정의 실천하기
▪ 자비 희구하기
▪ 겸손 생활하기

1.  정의(正義) 실천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이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경>에서 '미쉬파트'란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 가정, 노인 계층이 포함된 기초 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 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 1 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아니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

이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이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希求)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 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닐까?

3. 겸손(謙遜) 생활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 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 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삶이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자신 속에서 스멀스멀 자리 잡을 때가 있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해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라 한다. 그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어제 오늘 그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여기서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피와 눈물로 이루어 낸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 그런 민주주의 파괴하려는 자들에게는 향기가 없다. 안 봐도 비디오이다. 세네카는 "동일한 인간이 선왕이 될 수도 있고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자신에 주어진 이상인 ‘명예로운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몸을 다스린다면, 그는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왕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탐욕에 눈이 먼 사람, 그리고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스스로를 폭군으로 만든다. 폭군은 누가 봐도 끔찍한 악취가 나 혐오스럽다.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노자는 <<도덕경>> 제17장에서 노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가장 훌륭한 지도자란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마침 우리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뽑아 놓고 있는데, 문제는 국민의 50% 이상이 그와 그 그룹을 걱정하는 상태이다.

노자에 의하면, 가장 훌륭한 리더는 존재 정도만 알려진 자이고, 그 다음 그를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자이고,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 하고, 그 다음은 그를 비웃거나 업신여긴다. 4 단계이다.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차이를 설명하는 장이기도 하다. 무위(자연스럽게 함)는 사람들이 그것이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不知有之, 부지유지)이며 노자는 이것을 최상의 도라고 말한다. 유위함(억지로, 일부러 함)에는 세 단계가 있다.
-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송하는 단계(親而譽之, 친이예지)이고,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단계(畏, 외)이고,
- 사람들이 멸시하(업신여기는)는 단계(侮, 모)이다.

원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太上 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其次 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송하는 것이고, 其次 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其次 侮之(기차모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멸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나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라는 말을 늘 믿고 산다. 그 말은 '하늘의 그물은 넓어서, 성기기는 하나 새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늘이 모르는 죄가 있는 듯하지만, 벌 주기에 적당한 때를 선택할 뿐이라는 거다. 큰 물고기는 홀로 다니지만, 작은 물고기는 떼를 지어 다닌다. 작은 물고기는 서로 뭉쳐 돕지 않으면 큰 물고기한테 다 잡혀 먹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큰 물고기도 수명이 다해서 죽거나 그물에 걸려 잡힐 때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 사람의 손길은 피할 수 있어도 신의 손길은 피할 수 없다. 하늘의 섭리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갈지 않는 것이 없다.”

평생 역사를 연구해서 얻은 교훈으로 찰스 비어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꼽았다.
1. 하늘의 맷돌은 멸망시킬 자에게 권력을 줘 날뛰게 한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한다. 하늘은 오만한 사람을 파멸시키려고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에 중독되게 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기적인 생각과 권세욕, 욕망과 교만에 날뛰면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2. 하늘의 맷돌은 더디게 돌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간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도는 것 같아도 반드시 미세한 부분까지 분쇄 시킨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지만,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는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거다.
3. 하늘이 주관하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다. 예컨대, 꿀벌은 꿀을 도둑질해서 꽃을 피운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빼내는 것 같아도 그 꽃을 수정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한다. 하지만 꿀을 빼앗아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세상에는 꿀벌과 같은 강도들이 많다. 강탈자, 악인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날강도들이 설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합력해 선을 이루는 하늘의 계획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결국 하늘이 주관하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다.
4.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 우리는 당장 전개되는 현상에 교만 해지거나 혹은 의문을 품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늘의 섭리가 있으니 겸손히 그 뜻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개인의 인생이나 기업, 권력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문제는 이 모두가 인간의 눈에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은 사람이 보기에 난해하다. 그래서 신의 섭리는 없거나 침묵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섭리는 때로 묘하게 작용한다. A라는 죄에 대해 B라는 죄목으로 응징하기도 한다. 작가 이병주의 깨달음이다. 필화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경험한 그는 그것이 섭리였다고 말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한 대목이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다. 꼭 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인간인데 적용할 법조문이 없을 때 섭리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격언 그대로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 그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내가 적어 두었던 글이다.

정의/박교

정의란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란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의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정의란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잘못한 것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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