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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시국이 엄중해졌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4일)

어제 밤은 잠을 설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윤석렬의 비상계엄 선포 때문이었다. 소름이 돋는 게엄쑈 였다. 그러나 3 시간 만에 제압되었다. 그 힘은 계엄군의 겁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으로 저항했던 이름없는 시민들이었다.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 신속한 계엄해제 의결이었다. 시국이 엄중해졌다. 차분해져야 하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아침에 거리에 나가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인문 일지>의 주제를 바꾼다. 지난 주일 강론에서 '틈새 기도'라는 말을 배웠다. 틈을 이어주는 기도, 일상의 틈에 바치는 기도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줄눈이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기도가 내 일상의 틈을 메워주는 줄눈이 되었으면 한다. 기도가 내 일상이 튼실하도록 틈을 메우는 접착제가 되었으면 한다. 타일이나 대리석 등을 시공할 때 타일과 타일 사이에 모르타르 등을 채워 놓는 부분을 줄눈 또는 메지라고 한다. 타일이 온도 변화에 따라 수축 팽창 등 신축 작용을 하게 되는 데, 이 때 타일이 깨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는 것이다. 주로 백시멘트를 사용한다. 이것은 기공이 많아 습기 배출이 잘 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그라우팅이라 한다.

인문 운동가로서, 내 일상의 틈을 메우는 '기도(祈禱)'를 풀이하면,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도끼로 찍으려는 시늉을 하며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흔히 절대자인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 기도를 기복(祈福)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기도의 '기(祈)'자를 풀이하면, '빌 기'자이지만, 날카로운 도끼(斤)를 자기 앞에 겨누는(示) 수련을 뜻한다. 도(禱)는 목숨(壽)을 자기 앞에 내놓고 구(求)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배철현의 <<수련>>이라는 책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가 이와 같지 않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만을 무작정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오히려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행위다. 기도는 자신이 욕망을 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경청하는 수고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을 찾는 행위이고,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과 말,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건 '영적 성숙, 영혼을 살찌우자'는 거다. 그 '살찌움'으로 '허심'의 세계를 구축하는 거다.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 지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8)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신약 성경>>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 구절은 하느님에게 은혜를 간구하는 마법의 기도문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소망을 그냥 쉽게 들어주는 신이 아니다. 그리스도도 사막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을 떄도 아버지 하느님에게 섣불리 은총을 구하지 않았다. 사실 하느님에게 물리적 법칙을 깨뜨리고 우리를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다. 말 앞에 수레를 매달 수 없듯이, 문제를 마법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강한 의지와 올바른 성품, 지치지 않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편이 낫다. 아니면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하는 게 더 낫다.

저녁기도/류시화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는 기립근이 약해 잘 무너집니다
나를 붙잡아 주소서
나는 가시 뿐 아니라 꽃에도 약합니다
외로움에도 약하고 그리움에도 약합니다
세상 속에 사는 것에도 약하고
세상을 등지는 것에도 약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사랑에도 약하고
미움에도 뼈저리게 약합니다
말주변 없는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는 저항하는 것에도 약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약합니다
축복에도 약하고 저주에도 약합니다
진실에도 거짓에도 약합니다
내 얼굴이 나에게 낯설지 않도록
생의 저녁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심장은 혼자서도 이중창을 부릅니다
절망과 희망의,
용기와 두려움의 이부 합창을
그러니 많은 해답을 가진 자를 멀리하고
상처 입은 치유자와 걸어가게 하소서
나는 혼자인 것에도 약하고 함께인 것에도 약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에도 손을 거두는 것에도 약합니다
다시 한번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는 시작에도 약하고 끝에는 더 약합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에서 두 문장이 눈에 더 들어왔다. "내 얼굴이 나에게 낯설지 않도록/생의 저녁 나와 함께 하소서" 그리고 "많은 해답을 가진 자를 멀리하고/상처 입은 치유자와 걸어가게 하소서."

인생이 서글픈 건, 승자도 결국은 얻어맞기 때문이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상처 없는 얼굴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복서 따윈 없다. 단지 덜 맞고, 더 맞고의 차이가 있을 뿐.” 살다 보면 누구나 상처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느끼고 살고, 어떤 이는 잊으려 노력하며 산다. 상처가 적은 인생이 좋지만 더 좋은 건 상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를 극복해야 좋은 인생은 아니다.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믿고, 굳이 과거로 돌아가 상처를 헤집을 필요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스스로 주워 자꾸 자신의 몸에 꽂으며 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미 생긴 상처를 잘 받아들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축복을 뜻하는 'bless’는 상처를 뜻하는 프랑스어 ‘blessure’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우리 몸의 근육도 상처 받고 찢어지며 더 단단한 근육으로 성장한다. 비를 맞은 사람은 무지개를 볼 수 있고, 어둠 속의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 복효근의 시 <상처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상처입은 치유자'를 칼 융은 "운디드 힐러(Woundes Healer)"라 했다. '운디드 힐러'는 치유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타인의 상처도 돌보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아픔을 경험하는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도, 내 상처가 나를 치유해 주었다. 거기서 배운 것이 삶에 직접 맞서는 것이다. 그때 상처는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의 안내자가 아니라, 눈앞의 실체를 통해 체화되는 삶의 가치는 효율과 비효율의 기존 상식을 깨트렸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경험자의 조언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맞서는 것이다. 경험자들의 조언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불확실성의 세계로 직접 뛰어들어 결국 삶이 답을 알려줄 것이라는 차원에서, "안전하고 확실한 것에만 투자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행성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라는 페마 초드론의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진리가 삶의 두려움을 제압하며 큰 용기를 준다.

류시화 시인의 말이 소환된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埋葬)된 것이 아니라 파종(播種)된 것이다. (중략) 세상이 자신을 매장 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나는 아픔과 좌절의 어둠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 된 것이다. 매장과 파종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 하늘과 땅사이처럼 차이가 난다. 파종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바꾸는 것, 세상이 자신을 매장 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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