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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부사나 형용사가 뒤따르는 'Be+형용사 또는 부사의 삶'을 살도록 하자.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낮술을 하고, 오후에서 저녁까지 글을 읽고 쓰며, 한 카페에서 가는 가을, 오는 겨울을 지켜보았다. 날씨가 흐렸다. 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시간, 참 빨리 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두고,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한다. 장자는 우리의 삶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다. 홀연할 따름이다!"(『장자』 외편 "지북유")고 했다. 이를 간단히 우리는 "백구과극"이라  한다. 우리의 삶이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틈새를 지나치는 순간"이라는 '백구과극'이 실감나는 시간이었다.

배철현 선생은 "나를 온전한 '나'로 인정해 주는 것은 둘"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는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라는 장소이다. ‘지금'과 ‘여기'가 없다면, 나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만물을 현존하게 만드는 존재의 집이다. 과거를 삭제하고, 미래를 앞당겨 이 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이라면, ‘여기'는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생경한 나로 전환시켜주고 더 나은 나로 수련 시키는 혁신의 장소이다.

우선 시간 이야기를 좀 해본다. 우주의 심판자인 시간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어제의 모습, 아니 조금 전의 모습 그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이 시간의 심판자는 모든 것을 매 순간 변화시켜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 '무'로 사라지거나, '유'로 다른 성질로 변화한다. 시간은 '있음'을 '없음'으로 조용히 변신시키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시간이 나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하지만 시간은 내는 것이기도 해서,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예컨대,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냈다가, 힘들게 비웠던 그 시간이 가득 채워졌던 경험은 행복하다. 시간이 바뀌면, 공간은 따라간다. 그래 공간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방심(放心)하면, 우리의 시간은 그 속에서 사유(思惟)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냥 흘러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냥  우리의 시간을 흘려 보낸다. 25년간 호스피스 의사로 살아온 카렌 와이어트가 쓴 『일주일이 남았다면: 죽기 전에 후회하는 7가지』는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들의 안타까운 회한을 이렇게 담고 있다. 부사의 문제이다. '미리', '계속', '많이', '더', '마음껏', '끝까지', '항상'이다. 삶은 그래 공간과 시간에 맞는 부사의 문제이다.
▪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한 것,
▪ 사람을 계속 미워한 것,
▪ 여유를 많이 가지지 못한 것,
▪ 관용을 더 베풀지 못한 것,
▪ 마음껏 사랑하지 못한 것,
▪ 끝까지 노력하지 못한 것,
▪ 항상 감사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도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다. 사람(人)이 사람(人)을 만나야 인간(人間)이 된다. 그래 우리는 인간이다.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인간은 인(人)자 뒤에 간(間)이 붙는다. 그 인간(人間)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속에 존재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 ‘간(間)’를 우리 말로 하면 ‘틈’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영원한 시간 속의 짧은 ‘틈’과 무한한 공간 속의 좁은 ‘틈’을 비집고 태어나, 사람들 ‘틈’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존재이다. 이를 우리는 ‘삼간(三間)’이라고 한다. 그러니 살면서, 그 시간의 틈을 즐겁게, 공간의 틈을 아름답게 만들다 보면, 인간 사이의 틈은 사람 냄새로 채우며 행복하게 살다 가야, 멋진(To be good) 인간이 된다. '즐겁게', '아름답게', '행복하게'도 부사이다.

"To be good".  『소유냐 존재냐』의 에리히 프롬은 존재적 삶은 소유를 줄여 나감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존재양식의 삶이 가능해진다. 행복은 소유적인 삶에서 보다 존재적인 삶에서 더 많이 나온다.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문제는 근데, 그걸 얻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목표를 찾아 나서는 첫 마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소유는 우리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추구한 바를 즐기며 맛보는 것이다. 목표가 누리는 것이라면 과정자체도 당연히 누리고 즐기는 것이다. 목표가 설령 달성되지 않아도 또 달성되어도 매일 추구하는 과정을 우리는 즐겨야 한다. 목표를 끝내 달성하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도 날마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갖고 즐겨야 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부사나 형용사가 뒤따르는 'Be+형용사 또는 부사의 삶'을 살도록 하자. 나의 정체성은 형용사나 부사의 객수가 말해준다. 뭔가를 가져야만 하는 'have+명사의 삶'이 드러내는 '드라이(건조)함'은 'Be+형용사 또는 부사의' 삶이 주는 무한성과 다양성이 만들어 주는 기쁨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어, "덜렁", "달랑", "펄렁", "썰렁", "뭉클"이 겨울이 시작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들 속에 있는 나를 즐겁게 해준다.

12월 어느 오후/손석철

덜렁 달력 한 장
달랑 까치 밥 하나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썰렁 저녁 찬바람
뭉클 저미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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