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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43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4일)

1
그림자는 물체에 빛을 비추면 생기는 검은 그늘이다. 천연색의 입체를 무채색의 평면으로 모두 바꾼다. 아무리 잘 빼 입고 단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뙤약볕 아래라면 검게 이글거리지만 흐린 날엔 같이 흐릿해 지고 깜깜밤중엔 사라진다. 어쨌든 나는 그림자의 역할을 안다. 그래 그림자를 찍는 사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가 물리적 존재를 중첩하면서 비물리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자 없는 물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림자 없는 성공을 싫어한다. 나는 더 깊고 진한 그림자를 좋아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낙인 찍기를 넘을 수 있는 하나의 바로미터이다. 낙인은 당파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만의 배제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행될 때 더 아프고 치명적이다. 같은 진영이라면서 서로 욕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침소봉대 하여 공격하는 사람들은 서로 방해하는 모습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배제한다. 서로 가까이 있어 조금 부딪힐지라도, 빛과 그림자의 어우러짐으로 서로 중첩되어 새로운 지형을 만들 때, 나는 거기서 어울림과 연대의 미학을 깨닫는다. 빛만 쫓아 해바라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인들 속에 그림자로 묻혀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타인들의 광선 속에서 그림자로 반짝이는 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일상의 삶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생각이다.

2
수치스러운 가요? 그게 정상입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 겁니다.” ‘양심'은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올 초 탄핵 정국에 꺼내 든 화두였다. 당시 그는 “개인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탱하는 마지막 내면의 부르짖음이 양심"이라며 잊혀가던 양심의 가치를 다시금 환기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수치(羞恥)를 잃어버렸다. 도통 창피한 줄을 모른다. 빨리 우리 사회의 교육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자신의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며 친절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양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가 무식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행이 수치(羞恥)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한다.


책 <<수치심 잃은 사회>>는 더 나아가 부끄러움을 상실한 한국 사회를 다각적으로 진단한다. 사회심리학자인 저자는 수치심이 야말로 인간 다움을 지키는 감정이자, 관계의 공감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작동시키는 윤리적 신호라고 말한다. 수치심이 사라질 때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파괴되어 가는지 날카롭게 짚어낸다. 수치심 없는 사회는 책임 없는 사회다. 이 감정의 부재는 사회적 감시, 통제,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성의 기능 상실에 이어 공동체 윤리의 실종으로 이어진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책은 우리 사회가 수치심을 잃게 된 과정을 이명박정부 시절부터 돌아본다. MB 정부에선 ‘먹고사는 문제'가 도덕의 자리를 밀어냈다면, 문재인정부에선 공정이 오직 타인을 겨누는 무기로 전락했다. 윤석열정부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수치심이 완전히 해체된 사례라고 썼다.
저자는 묻는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책은 그저 스스로 얼굴 붉어지는 감각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괴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수치심은 회피해야 할 열등의 감정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인간 다움의 출발이라는 얘기다.

3
사람들이 너무 뻔뻔해 졌다. 수줍음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너무 수줍음이 많아 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수줍음은 사라졌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위대한' 수줍음이 되었다. 뻔뻔해 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치미 떼기의 명수가 되어야 돈도 많이 벌고, 남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꼭 이렇게 까지 하며 살아야 해, 라는 의문이 자꾸 든다. 잃어버린 수줍음을 어디에 가서 찾아올까? 

시치미 떼기/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 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시치미" 떼고.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 두는 인식표를 말한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를 훔쳐 시치미를 떼어버리고는 새 시치미를 붙여 자신의 매라 주장했다 한다. 그래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왔다.

4
우리는 누구와 만나면 즐거운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가 애정 하는 대상을 내가 알고 있으며 아침의 내 분노에 한밤의 그가 공감을 해줄 때 나는 이따금 우리의 시공간적 거리를 잊곤 한다. 그 때 그 사람이다.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장항준 감독의 말처럼, 서로 분노하는 지점과 웃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웃는 포인트가 같다는 건 취향이 비슷하다는 뜻이고, 분노하는 지점이 같다는 건 세계관이 통한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은 유효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그냥 곁에 있어 준다.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면 말이다. 소설가 백영옥은 "하늘이 내린 꿀 팔자란 스스로 만드는 것 아닐까?" 하고 묻는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란 참 희한해서 다른 이의 큰 성공에 기뻐하는 것이 큰 슬픔에 함께 우는 것보다 언제나 더 어렵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능력은 실은 자존감과 직결돼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믿음 없이 타인의 성공에 마음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그냥 곁에 있어준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 “같이 지내려면 말(대화)도 중요하지만, 감정을 주고받는 것도 중요해요.” 그녀는 ‘그냥 언니처럼, 동생처럼’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준다. 곁에 머물러준다.

5
그러나 나는 비겁하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많지 않다. 신문으로 세계 곳곳의 전쟁과 학살 소식을 접할 때 나는 아뜩한 시차를 느끼곤 한다. 분명 우리는 지구촌 이웃인데, 이 소식으로 부터는 이토록 거리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는 분명 비겁함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읽고 같은 것을 듣는데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림으로써 아뜩해 진다. 외면해선 안 된다.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아야 한다. 남의 일,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인 것이다.

그래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라는 책을 소환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겸양의 미덕을 배웠다. 그건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가급적 양보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통하는 방식이다. 키워드가 4개이다. 양보, 존중, 무아(無我) 그리고 소통이다. 볼테르는 <<깡디드>>에서 헛된 꿈을 꾸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고 했다. 성공에 집착하고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야망보다는 평범을 꿈꾸라는 거다. 

한 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물으며, 이 책은 여러 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단을 경계하고 중용을 중시하라고 했다. 톨스토이는 "나는 평범함을 열망한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성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하고 평범한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했다. 조지 엘리엇은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고, 그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며, 이는 곧 기쁨과 성취감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 안톤 체호프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 자작나무의 어린 새순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에 애정을 갖는 일은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했다. 조지 오웰은 "완벽한 환상보다 일상의 상대적인 불만족이 더욱 가치 있다"고 했다. 전 세계 현자들이 말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평범이라고 말했다. 삶은 완벽하지 않아 완전하고 평범함 없는 특별함은 존재할 수 없다. 오늘 아침 사진도, 우리들의 채소밭에 있는 채송화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평범하여 찬란한 삶"이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자 하는 바람이며,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이다. 쉽게 말하면, 평범한 것들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야말로 진정한 삶을 가치라는 거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그럴듯한 허울을 열망하며, 주연만을 꿈꾸는 이들에게 바치는 인생지침서라고 한다. 나 자신도 여기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그만하면 괜찮다'는 개념에서 출발한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란 다음 4 가지를 말한다.
▪ 헛된 야망의 실현이 아니다.
▪ 비겁한 타협이 아니다.
▪ 다른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려는 노력이다.
▪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이다.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는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교통 법규 위반에 적발된 자신만 재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처럼,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 중의 하나이다. 모두 다 법을 지키지 않는데, 적발된 자신만 재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경우이다.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6
거짓이 문제이다. 거짓이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작은 거짓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작은 거짓들이 보태 진다. 그 다음에는 그런 거짓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생각의 흐름을 왜곡한다. 그 왜곡된 생각의 결과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이 동원된다. 필요할 때마다 거짓을 행하면서 거짓은 이제 습관이 된다. 거짓이 '무의식적인' 믿음과 행동으로 굳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우리는 이를 '자기 기만'이라 한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자기 기만을 피하는 길이 그저 잠시 앉아 살피는 일인데도, 우리는 떠밀려 살아온 관성을 제어할 용기를 못 낸다. 기만이라는 덫에 걸리는 사냥감은 대개 탐욕일 경우가 많다. 나의 탐욕과 집단의 탐욕을 바라보고, 해체하고,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새우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시간처럼 인간도 진정한 어른으로 탈피하는 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9
그리고 거짓이 성공을 거두면 그 후에는 교만과 우월 의식이 따라온다. 사실 거짓으로 이룬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 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모두 속임수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 멍청하다'라는 교만과 우월 의식에 빠지게 된다. '모두 어리석어서 나에게 속아 넘어간다. 따라서 나는 원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나중에 닥친다. 거짓으로 개인과 현실, 혹은 사회와 현실 간의 관계가 무너질 때 지옥이 찾아온다. 그러니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진실은 삶의 깊고 깊은 원천에서 끊임없이 샘 솟는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필연적인 비극에 맞닥뜨리더라도 영혼이 위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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