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7월 11일)
어제는 딸과 모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지영 소설을 대출하였다. 그 사이에 나는 대전에 2개밖에 없는 우리 동네의 보호수인 회화나무를 만나러 갔다. 대전에는 외삼동과 가정동 2 곳 밖에 없다. 회화나무는 일명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하며,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스칼라 트리(scholar tree)라고 한다. 한자로는 괴화(槐花)나무로 표기하는 데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로 부르고 있다. 괴화 나무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화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문 앞에 회화나무를 심어 잡귀신의 접근을 막아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자수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옛 선비들은 '학문'을 게을리 핮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알리기 위해 먼저 마을 입구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더불어 기름을 짤 수 있는 쉬나무도 같이 심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쉬나무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화화나무로서 곧은 학자임을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짐승이나 사람들은 늙으면 추해지는 데 반해 나무는 늙을수록 아름다워진다. 오늘 아침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나무는 대전 유성구 가정동에 있는 대전교육정보원 뒤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이 350년 이상 된 노거수(老巨樹)이다. 수령이 많고 커다란 나무란 뜻이다. 쉽게 말해 오래는 거목이다. 무더운 여름인데, 당당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가정동 회화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창주사적공원이다. 창주는 김익희 선생의 호이다. 이곳은 김익희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공원과 묘이다. 김익희는 본관이 관산으로 김장생의 손자이다. 공원이 잘 가꿔지지 않아 찾는 이들이 드물다. 아쉽다.
이젠 어제 다 못한 노자의 <<도덕경>> 제32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장에서 말하는 '도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내용을 의미로 갖는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개념화나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항시 변화한다. 그런데 이름(名)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 즉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본질을 담아 내는 개념화 작용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름은 세계의 어떤 부분을 어떤 내용 안에 가두고 정지시키며 구분 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노자가 보는 세계는 이렇지 않다. 모든 것이 반대편의 것과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변화 과정 속에 있다. 일정한 본질을 내용으로 해서 가둘 수도 없고 한 순간도 정지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원칙을 나타내 주고 있는 도를 이름으로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가 늘 하는 말이다.
여기서 키워드가 되는 문장이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항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도(道)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자 자연의 존재 형식이다. 도는 모든 인위적 조작 이전의 것이며 제한과 가공이 가해지기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박(樸, 통나무)'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왜 '박'이 '소(小)'한가? 노자는, 이 세계가 반대되는 대립항들이 꼬여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만, 대립항들이 꼬여서 되어 있는 자연의 운행 원칙은 유약하며 여성적이고 은밀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거다. 도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도는 태양처럼 밝거나 산처럼 높거나 불처럼 강렬하지 않다. 물처럼 유약하며 달처럼 은은하고 계곡처럼 낮고도 낮다. 그런 도는 비록 미약하게 작용하지만, 사실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 모든 가치를 간장하고 있는 진짜 강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대상 화하여 부릴 수 없다. 오히려 도의 지배를 받으며 도의 운행 원칙 위에 잠시 떠 있는 것이 세계의 모습이다.
따라서 노자는 '통치자가 그것을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스스로 모여들어 복종할 것이다'고 했다. 원문은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이다. 만일 통치자가 이런 원칙, 즉 도가 함축하는 의미를 잘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그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자빈(自賓)"이란 말이 이해가 된다. 노자가 바라보는 최고의 정치는 도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정치이다.
다음은 최진석 교수로부터 배운 거다. 노자가 보기에 세상의 혼란은 일정한 가치관을 전통으로 확립하여 거기에 모든 백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로부터 비롯된다는 거다. 어떻게? 일정한 기준이 적용되면 세상은 항상 그 기준을 근거로 해서 분리되고, 그 분리 과정으로부터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이 발생되어 나오기 때문에, 결국 그 분리 자체가 갈등을 유발한다. 그런 사회에서 합의되고 정의된 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따라오지 못하는 부류는 억지로 끌어다 그 기준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에 도의 모습은 이렇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니 도를 실천하는 모습도 이렇지 않아야 하는 거다. 만물은 미약하고도 유익하게 작용하는 도의 원칙을 실천하는 이런 사람 주위로 모두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다. 그래 노자는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이라 말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天地相合(천지상합) 以降甘露(이강감로) 民莫之令而自均(민막지령이자균) 民莫之令而自均(민막지령이자균)"이다. 이를 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 단 이슬을 내리듯이 백성은 법이 없어도 저절로 균등해 진다'이다. 여기서 나는 "자균(自均)"에 방점을 찍는다. '저절로 균등해진다'는 말인데, 나는 '스스로 균형을 찾는다'로 읽고 싶다. 마치 거대한 자연 안에서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만나 자연스럽게 단 이슬(감로)를 내리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인위적으로 정해진 명령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의 존재 원칙을 적용하면 백성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균형을 찾아 안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잠시 멈추고 오늘의 시를 한 편 감상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특히 "지지(知止, 멈출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사유해 본다. 나는 어제부터 훈육(訓育)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다. 말 그대로 하면, "가르쳐 길러냄"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훈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교가 온통 입시 위주의 경쟁 체제로 공부를 잘하면 다 용서가 되는 '이상한' 학교 문법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지지"도 훈육의 한 가지라 생각한다. 예컨대, '자기 훈육'말이다. 영어로는 'discipline'라 한다.
교육학 용어로 훈육은 '사회적 규제나 학교의 규율과 같이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요청되는 행위나 습관을 형성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동체나 사회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여러 가지 바람직한 습관을 형성시키거나 규율위반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교정하는 것을 말한다. 훈육을 통해 습관을 형성시키는 것보다 행위를 교정하는 데 초점을 두면, 훈육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린다. 그래서 상과 벌에 위한 훈육보다는 대화나 상담을 통한 심리적 교육의 원리를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내 주변에 상담 교사들의 모습이 전문가답지 않다. 그래서 당분간 스캇 팩의 <<아직도 가지 않은 길>>을 정리해 공유할 생각이다. 7월이 깊어 간다. 오늘은 반기룡 시인의 <7월>을 감상한다. 어제 여러 가지 일정이 있어 <인문 일기> 화요일 아침에 마친다. 오늘은 강요 받는 일정이 하나도 없다. 오전에 주말 농장을 다녀올 생각이다.
7월/반기룡
푸른색 산하를 물들이고
녹음이 폭격기처럼 뚝뚝 떨어진다
길가 개똥참외 쫑긋 귀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토란 잎사귀에 있던 물방울
또르르르 몸을 굴리더니
타원형으로 자유낙하한다
텃밭 이랑마다
속알 탱탱해지는 연습을 하고
나뭇가지 끝에는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오동통한 햇살로 푸르름을 노래한다
옥수숫대는 제철을 만난 듯
긴 수염 늘어뜨린 채
방방곡곡 알통을 자랑하고
계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문지방은
말매미 울음소리 들을 채비에 분주하다
노자 <<도덕경>> 제32장의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始制有名(시제유명) 名亦旣有(명역기유) 夫亦將知止(부역장지지) 知止可以不殆(지지가이불태)"를 다시 읽어 본다. '이름은 만물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것이니 이름을 이미 얻은 후에는 대저 또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다. 이름 없던 통나무가 쪼개져 마름질(制, 제)을 당하면 여러 기물이 생겨나고(樸散則爲器, 박산즉위기), 거기에 각각 이름이 붙듯, 단순하던 원초의 미분의 세계에서 의식적인 분별의 세계로 바뀌면 여러 사회 제도(制)가 생겨나고 거기에 여러 기구의 명칭이 따른다. 물론 기물이든, 제도든 이런 현상 세계의 사물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고,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어느 면에서는 불가피까지 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분별의 세계, 대립의 세계, 의식의 세계, 제도로 얽힌 세계는 궁극적으로 도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소외' 상태이므로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위적인 조작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있고 이로 인한 갈등과 투쟁과 분쟁이 있게 마련이므로 이런 현상 세계의 본질과 한계를 꿰뚫어 보고 이런 대립의 세계에 계속 안주하거나 몰입하는 일을 "멈출 줄 알아야(지지, 지지)' 함을 말하고 있는 거다. 멈출 줄 알면, 위험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훈육'이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훈육은 '자연에 존재하는 거대한 일관성'을 보게 하는 일이라 본다.
오강남의 해설에 따르면, 멈출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시 주객 이분을 넘어서는 초이분(超二分)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서 살아 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거다. 나는 거기서 필즈상을 타고 우리를 주목하게 한 허준이 교수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짧은 동영상에서 그가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수학의 세계가 도의 세계가 아닐까?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수학이 그것을 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 수학 이야기는 다른 날 좀 더 이야기 하고 싶다.
다시 노자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노자가 보기에 이 세상은 관계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에, 개념(名)으로 고정하거나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 제도를 운용할 필요 때문에 '명(名)'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명(名)은 노자 철학 안에서 일관되게 '구분', '명분', '직책' 그리고 '개념' 등의 의미와 함께 쓰인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명분에 맞게 직책이 정해졌으면, 그 직책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는 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할 수 없다는 것 또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 한계를 잘 지켜야 한다고 노자는 생각한 것 같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 몫만큼의 케이크에 만족하고, 또 자기 몫만큼의 케이크만을 먹는 소박한 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능력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알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인간의 순수한 자연성을 파괴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욕망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또 이 욕망은 대개 인위적 조작에 의해 형성된 어떤 가치 체계의 지배와 인도를 받으면서 분출된다. 따라서 끊임없는 자기 훈육이 필요하다.
이 장의 마지막 비유는 개천이나 계곡의 물이 저절로 강이나 바다로 흘러들 듯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도를 향해 되돌아 온다. 이처럼 지도자가 도와 하나가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이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그 지도자를 향해 모여든다는 것으로 읽고 싶다. 지도자가 사람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실적주의나 얄팍한 인기 전술 같은 잔꾀나 술수를 쓸 것이 아니라, 자연의 기본 질서인 도와 함께 하면 인심은 저절로 모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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