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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상이 말들의 잔치로 어지럽다.

324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11일)

1
우리는 흔히 '연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초록'이라고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연두'는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연두는 완두 콩의 완두를 생각하고, 그 완두에서 초록을 생각한다. 초록은 풀의 푸른색을 직접적으로 연상하지만, 완두의 초록이 하나의 필터를 더 가진다. 초록이라고 해서 단 하나의 초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초록이 있다. 노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고, 파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초록은 적색이나 주황에 더 가까울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연두의 초록은 어떤 색에 가까울까?

'연두'는, 오늘 아침 사진 처럼, 새로 갓 나온 잎의 빛깔이다. 연한 초록의 빛깔이다. 맑은 초록 혹은 조금은 덜 짙은 초록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연두'의 빛깔은 풋풋하고, 순수하고, 설레고,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상태 같다. 속되지 않고, 마음이 맑고 신선한 상태 같다. 조금은 들떠 두근거리고, 일렁거리고, 조심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의 자세가 연두의 속뜻 같다. 우리 본래의 마음 그 어귀가 바로 이 연두의 빛깔이 아닐까? 

연두/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2
오늘은 말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세상이 말들의 잔치로 어지럽다. 너나 나나 다 '난가병'에 걸려 조기 대선 후보로 나와 아무말 잔치를 하기 때문이다. 연두 빛 세상을 더럽힌다. 인문 운동가의 눈에, 조기 대선 후보로 등장하여 내뱉는 출마 선언의 언어들이 썩었다. 냄새가 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역사와 정치문화를 기록하고 분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서 내란에 빠진 도시국가를 묘사한다. 질서는 무너졌다. 누구나 복수하고, 복수는 정의롭다 여겼다. 공공의 이익을 생각해 정치적인 소신을 가지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이 죄를 저질렀으니 죄인도 없었다. 여기서 투키디데스가 지적한 것이 의외로 언어의 변질성이다. 환경이 바뀌면 언어의 지시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모함은 용맹함으로, 신중한 자는 겁쟁이로 여겼다. 음모에 가담하면 강하고, 그렇지 않으면 약하게 보았다. 투키디데스는 나아가 말한다. 혼돈 속에서 다수의 평등한 권리를 약속하는 민주주의도, 귀족층의 지혜를 일컫는 과두정치도 빈 단어들을 사용할 뿐이라고. 이런 현상은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반복되리라고 투키디데스는 예언했다. 등줄기가 차가워진다. 지금 위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 언어의 변질성이다.

3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윤 파면 선고일인 올해 4월4일까지, 그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혼란과 더불어 언어의 혼탁도 절정에 달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언어는 여전히 극단의 경계를 맴돌고 있다. 높은 학벌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거짓과 교묘한 말로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 법률가, 학자뿐만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야 할 종교인, 정론을 펼쳐야 할 언론인들조차 부끄러움 없이 불순하고 뒤틀린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이들이 정말 문장을 잘못 읽고 그릇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자신들의 진영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논리를 조작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1949년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그의 마지막 작품 <<1984>>를 출간한다. 조지 오웰이 상상하는 전체주의 사회, 여기서 언어는 또다시 폭력의 산파역을 맡는다. "전쟁은 평화이고 자유는 예속이고 무지가 힘이다." 오세아니아-조지 오웰이 만든 가상의 나라-는 그렇게 자기 정당화한다. 이렇게 오래 듣고 믿으면 언어와 진실 사이의 괴리를 잊게 된다. 언어는 결국 닻 없는 배와 같이 떠다닌다. ‘정의’나 ‘진실’은 정의로운 것과 진실한 것에 더이상 구속되지 않는다. 인간이 오히려 언어에 기만을 당한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자신에게 속삭이는 말이다. 알고도 모르게 언어를 느슨히 이해하며 본인의 행동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어를 휘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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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탄생이 호모 사피엔스를 전인류로 묶어 주었다면, 문자가 탄생하며 또 하나의 도약을 하게 된다. 동아시아는 한자, 인도는 산스크리트어, 중동은 아랍어, 유럽은 라틴어가 탄생하며, 호모 사피엔스는 창조적인 도약이 시작되었다.

말은 시간적 선형성을 지니고 있어서 불 가역이고, 허공에 흩어지면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이 시간과 공간을 넘으려면 결국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유가 말보다 더 오래, 멀리 전파되는 회로를 찾고자 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기억이란 조건을 넘어서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말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고를 교류하는 첫 단계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후세의 사람들, 동시대인이 아니어서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글의 교류로 이루어진다."(이븐 칼둔, <무낏디바>)

언어를 문자에 담으면서, 우리는 불멸을 얻었다. 이로서 일류는 시간의 한계, 공간의 장벽을 통과하고, 시공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을 정의해 보면,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존재, 이에 더해 문자를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 존재이다. 태초에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피던 그 관찰이라는 실존적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지만, 그것은 이제 말과 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말과 글은 늘 서로 번갈아 등장한다. 때론 유연하게 어울리고, 때론 심오하게 맞서면서, 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즉 천지인을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신성한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5
그러니까 하늘이 열리고 인간의 길이 시작된 출발점은 바로 ‘말’의 탄생이었다. 생명이 움트고 피어나는 힘도 결국 언어에서 비롯된다. 생명의 언어는 어둠과 혼돈을 가르고 나아가는 빛이며, 진리의 말은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다. 말이 생명을 불러냈기에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어 또한 생명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붓다와 예수는 그런 생명의 요청에 ‘말’로 응답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어는 생명의 빛을 흐리게 만들고, 오히려 생명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회복은 곧 생명의 회복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수양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 붓다와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했다. 모든 종교는 거짓된 증언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언어를 엄격히 금지한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주장하거나, 공동체를 해치는 언행을 반복한 제자들을 승단에서 영구 추방했다. 붓다의 ‘탄핵’이자 ‘파면’이었다.
-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했다. <<논어>. <학이편> 3장에 나오는 말이다. "巧言令色 鮮矣仁.(교언영색 선의인)이 원문이다. 이 말은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사람 중에 마음이 인(仁)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巧言(교언)"은 말을 교묘히 잘하는 것을 말한다. 말을 교묘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내는 숨긴 채 상대가 듣기 좋은 말로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에게 득이 되도록 살살 꾀는 것이며 가면 속에 자신의 본래 얼굴을 감추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말 잘하는 사람으로 재아와 자공이 있었고, 덕행이 뛰어난 사람으로 민자건과 안연이 있었다. 재아는 말은 잘했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재아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을 잘하던 재아가 공부할 시간에 낮잠을 잔 것이다. 공자는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오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할 수가 없다.”(<공야장>편)고 경책했다. 재아는 이를 계기로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공자가 안회와 대화할 때 “선생님 인(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네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이기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안연편)이라고 했다. 다시 안회가 “스승님 어떻게 하면 아직 남아있는 욕심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자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안연편)”고 했다. 또한 인(仁)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이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도록 하지 마라”는 뜻이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은 충과 서일 따름이다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고 할 정도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에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으며 현재 곡부의 공부(孔俯)를 만든 주인공이다. 특히 공자가 죽고 삼년상으로 그치지 않고, 육년 동안 공자의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스승을 그리워했다. 정치인들 가운데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도 진심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많다. 

6
화려한 말과 연출된 태도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은 오늘날 정치인들, 특히 ‘태세 전환’에 능한 이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12, 3 내란 종식'에 가만히 있다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듯이, "개헌과 국민 통합 새민주 후보가 해내겠습니다" 같은 말을 뻔뻔스럽게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일구이언(一口二言)’이 공공연히 용인되는 시대가 됐다.  학문적 소신을 왜곡해 권력자에게 유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표현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우리는 신념을 저버리고 권력에 기대는 지식인, 법조인, 정치인을 볼 때마다 깊은 씁쓸함을 느낀다. ‘무지가 욕망을 낳는다’고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욕망이 무지를 낳는다’는 깨달음을 준다. 대통령 탄핵 이후 쏟아진 수많은 말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겉보기에 타당하고 도덕적으로 들리는 문장들, “이제는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자” “배제와 혐오를 멈추고 관용과 포용으로 나아가자” “극단의 정치를 극복하고 중도의 길을 걷자”. 그 말들만 따로 떼어 보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왜 이 말들이 불편하게 다가올까? 그 말을 하는 이들의, 의도(맥락과 인과)를 생략한 채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맥락 없는 언어는 때때로 노골적인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 없이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말하는 ‘통합’과 ‘관용’은 사회를 더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역사는 압축과 비약은 있을지 언정 생략은 없다. 반성과 책임을 생략한 통합은 결국 그 대가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할 것이다. "말이 생명의 본질을 회복하고 공동체가 건강하게 되살아나기 위해 이 땅의 선하고 지혜로운 시민들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주문한다. 주문. 거짓과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 사회를 미궁에 빠뜨리는 불순한 말들을 파면한다."(화순 불암사 주지 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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