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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앞날 분명하지 않아도 살아봅시다, 기쁘게 떳떳하게.”

32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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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간 한국에서 사목 한 두봉 주교 선종 전의 마지막 인사가 오늘 아침에 새롭게 다가왔다. “앞날 분명하지 않아도 살아봅시다, 기쁘게 떳떳하게.” "기쁘고 떳떳하게". 두가지다. 기쁘게 산다. 그 다음은 떳떳하게 산다.

두봉 레나도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나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54년 한국 파송 후 71년간 한국에서 약자들을 위해 사역했다. 나는 프랑스에 유학 당시 마지막 해는 파리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기숙사에서 지내는 영광을 누렸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어린 시절 고향 성당의 신부님이 프랑스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 시절 프랑스 어를 배우며 크게 성장했던 것도 같은 소속의 신부님 서 퐁세이시다. 프랑스어 이름이 질베르 퐁세인데, 여기서 한국 이름을 '서 길벗'으로 지으셨다.

문제와 갈등은 현존하지만 그래도 기쁨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그러니 가급적 웃고 산다. 그것도 크게 웃는 버릇을 갖는다. 웃다 보면 일이 잘 안 되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기뻐진다. 기쁨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하려면,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나를 버리고 비워야 한다.


기쁨/이성부

살아갈수록 버릴 것이 많아진다
예전에 잘 간직했던 것들을 버리게 된다
하나씩 둘씩 또는 한꺼번에
버려가는 일이 개운하다
내 마음의 쓰레기도 그때 그때
산에 들어가면 모두 사라진다
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와 앉은 이 기쁨!


버린다는 것, 그건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 늘 우리의 서랍이 잘 닫히지 않고, 아울러 마음 또한 붐비고 갈수록 점점 더 비좁아진다. 버림은 고치는 것에 가깝다.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을 고친다는 것은 곧 화를 버리는 일이 아닐까? 동시에 버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잘 골라서 간직하는 것이다. 고르고 또 고르고 또다시 고른 끝에 남은 것 만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건이든 기억이든 사람이든. 버려야 할 것은 고치고 그 끝에 남은 것을 간직하고 가지지 말아야 할 것 들에는 애당초 눈을 돌리지 않아야 그 빈자리에 기쁨이 들어선다. 

2
아침에 두봉 주교의 인터뷰를 읽으며, 오늘 인문 일지를 쓰고 있는 거다. 같이 사는 50대 이장인 농촌 총각과 베트남 아가씨는 두봉 주교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한다. 그때 한국말을 모르는 베트남 신부 가족을 위해 그는 커다란 백지에 베트남어로 ‘사랑, 인내, 친절’이라고 큰 글씨로 써서 하객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이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크게 읽었더니 다들 까르르 까르르 웃었어요. 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어요.”

"사랑, 인내, 친절". 이 세 가지는 다 나를 죽이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 나의 경우는 마음 속으로 "I'm nothing(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을 속으로 되 뇌인다. 그러면 사랑, 인내, 친절의 행동이 나온다. 나는 나다. I was everything. I was something. I am nothing, but I am who I am. 나를 힘 나게 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살면서 제 속 채우느라 애쓸 뿐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공유하는 도 하나의 다른 시처럼, 고등어는 속 비고 나니 돌아와 제 아낙 안고, 평생 애 끓던 아낙도 속 덜어 내고서야 굽은 등 편히 맡긴다. 죽기 전에 속을 비울 수는 없을까? I'm nothing(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이라고 하면,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일 일 없을 것이라 믿는 아침이다.


간고등어/이언주

어물전 한 편에 짝지어 누운
한물간 고등어
속 다 덜어내고 상처에
굵은 소금 한 줌 뿌려
서로의 고통 끌어안고 있다

무슨 연으로 먼 바다를 떠돌다 
한 생이 끝나도록 저렇게 누웠을까 
지아비 품 크게 벌려 
아낙의 푸르딩딩한 등짝 안고, 
빈 가슴으로 파고든 아낙 
짭조름하게 삭아 간다

남세스러운 줄도 모르고
대낮부터 포개고 누워있는 저
부부
눈도 깜박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등 짝에 파도 문신 새기고 기세 등등 하던 지아비, 동해 바다 가르던 지느러미 칼도 한 뼘 좌판 위에선 어째 다소곳하구나! 살아서 제 속 채우느라 애쓰다, 속 비고 나니 돌아와 제 아낙 안는구나! 평생 애 끓던 아낙도 속 덜어 내고 야 굽은 등 편히 맡기는구나! 평생 무리 속에 사느라 둘이 담쏙 안아 보기도 우세스럽긴 했으리라. 이제 둘이서 눈도 깜박 않고 바라보는 곳은 살아온 길인가, 접어든 길인가? 소금 한 줌 더 뿌려도 이제 쓰리지 않다. 푸르딩딩한 날들, 짭조름한 날들 고스란히 바다에 두고 왔다. 살아 있는 그대들, 쓰리거나 사랑하거나!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에서 배운 '낫싱 스페셜(nothing special)' 이야기도 소환한다. 이 말을 프랑스어로 하면, '빠 드 스페씨알(Pas de special)이다. 한국말로 하면, '큰일 아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가 된다. 12.3 불법 계엄으로 불안해 하고 우울한 일상들을 보내고 있는 올해 더 위로를 해주는 말이다. 이건 류시화 시인의 이 말에 대한 해석이다. "단지 하나의 사선일 뿐인 데도 우리의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더 중요한 것에 멀어지게 된다. 그걸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고,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그러니 살아남아야 한다.

3
두봉 주교님은 "최고 사랑이 최고 행복"이라고 했다. 사랑과 인내와 친절이 모이는 곳이 마을이라고 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아빠 엄마, 삼촌, 다섯 남매와 5살 7살 된 사촌이 같이 살았어요. 일곱 아이와 부대끼는 한가운데서 남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1차 대전 때 말라리아에 걸려서, 우리 집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대부분 초등학교 까지만 다녔고, 저만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고3 철학 시간에 유교, 불교, 도교, 세상의 모든 종교를 배웠어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에 반해서 두 손을 번쩍 들었죠. 하하. 그 시절에 배운 사랑과 행복의 기둥이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됐어요. 사랑이 얕으면 행복도 얕아요.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요. 행복은 사랑에 달려있어요. 최고로 사랑해야 최고로 행복합니다.”

4
그 다음 주교님의 말씀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슨 기도를 하시나요?" 묻자, 그 대답이 이것이었다. “뭐가 필요한 지 제 마음을 다 아시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킵니다. 전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어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하느님 앞에 가만히 있어요. 입을 벌려 ‘하’ 소리를 내고 두 팔을 벌려 엎드립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으시네요" 하니까, “없어요.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줘요. 여름엔 풀 뽑고 물 주고 농사를 지어요. 기쁘고 떳떳해요"라 하셨다. "기쁘고 떳떳해요." 남은 생을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기쁘고 떳떳하다." 이 말은 주교님이 안동 교구장으로 있을 때 만들었다고 하셨다. "60년 전 교구가 생길 당시엔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농촌 인구가 확 줄었어요. 젊은 사람도 없고 앞날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어요. 도시 사람들처럼 노는 거, 먹는 거, 돈 쓰는 거 마음껏 못해도 괜찮다.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아보자. 농촌은 생명을 만드는 곳이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면서, 그러다 보면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소박한 마음으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자. 이런 마음으로 사순절 시기부터 손수건을 늘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그러면 물수건을 덜 쓴다. 생명을 지키는 작은 일이다. 인터뷰를 했던 기자의 말처럼, 귀를 막고 제 옳은 소견대로 말했고, 내일의 사명도 내일의 날씨도 몰라 갈지자로 살았던, 그리고 기쁘지도 떳떳하지도 않게 보낸 시간들이 사무쳤다. 주교님의 말씀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주변 사람들과 실천하고 싶다. “살아보면 알아요. 어쨌든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제목을 짓고 선언하며 살아보니까, 그렇게 살아져요. 앞날이 분명하지 않다고 신경을 쓴다든가 그런 게 없어요. 나름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몇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자, 그러면 분위기가 살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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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3일 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많은 실망을 했고, 특히 지난 금요일 오후 염치는 일도 없이 뻔뻔한 대통령에 파면된 부부가 관저를 나오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주교님의 다음 말씀에 좋은 면을 더 많이 보고, 좀 더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나는 가까운 곳에 작은 밭이 있으니, 그곳에 더 자주 갈 생각이다.  “(어두운 얼굴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세상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져요.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안 좋은 것도 많습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그래도 이로운 게 더 많습니다.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사세요. 악보다 선이 훨씬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많이 움직이라고 했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지고 나쁜 생각을 덜 한다고 하셨다.

일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나는 <<장자>>, <<도덕경>을 꼼꼼하게 읽고, 최근에 <<주역>> 공부를 하며 배웠다. 세상에 돌아가는 "도"가 있다는 것을.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신경 써봐야 소용 없다'였어요.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일평생 내가 머리 써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어요. 마음 비우고 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동양 고전식으로 말하면, '도'에 맡기는 거다.

자신의 이름인 두봉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봉양 두씨로 본관을 정해 시조로 호적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는 1954년부터 71년간 "정직과 낙관"을 갖춘 한국인의 의젓함을 사랑했다. "정직과 낙관", 일상의 지혜이다. 정직하게 살아 떳떳해야 한다. 낙관론자여야 기쁘게 살 수 있다. 내 생각이다. 잘 살자. "기쁘고 떳떳하게".


두봉 주교의 프랑스어 이름은 르네 뒤뽕(Rene Dupont)이다. 그가 지난 4월 10일에 96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 빈다. 주교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주교님에 오늘 사진의 흰 꽃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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