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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매일 비우는 것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10일)

'화란춘성 만화방창(花爛春盛 萬化方暢)'의 호시절이다. 노래도 있다.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꽃이 만발하고 화려하여 한창 때인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란다. 만화방창에서 화가 꽃 화(花)자가 아니라, 화(化)이다. 꽃들은 다른 꽃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나 답게 자신을 뽐낸다. 나 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나 답게 살고 있는가? 로버트 존슨의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라는 책을 이재형의 『발가벗은 힘』 에서 알게 되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빛을 사랑한다. 그러나 빛이 밝은 만큼 어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 빛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빛을 밝힐수록 어둠 또한 확대된다. (…) 칼 융이 말한 '온전함'이란 전인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착하고 선한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빛과 어둠, 이 둘 다의 합이다." 실제로 융이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화창한 봄날에 노자 <<도덕경>> 읽기로 홀가분한 주일을 보낸다. 오늘은 제20장을 읽을 차례이다. 책을 펴니, 첫 문장이 "絶學無憂(절학무우)"이다. '배움을 중단하면 근심이 없어진다' 아니 '배움을 끊어야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 잘 읽어야 할 문장 같다. 언뜻 보면 공부하지 말라는 말 같기 때문이다.

첫 구절에 "절학무우"라는 말을 배치한 걸로 보아 앞선 18장, 19장과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는 장이다. 배움(學)은 <<논어>>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사람의 도리를 깨우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노자는 반대로 이것을 끊으라고 말한다. 한참 생각을 했다. 사실 <<논어>>가 제시하는 세계관에서는 '학'이 중심 역할을 하고, <<도덕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에서는 '도'가 중심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덕경>>에서 '학'을 부정하여 절학(絶學)할 것을 요구하고, <<논어>>를 신봉하는 쪽에서는 상도(常道)를 제한하여 가도(可道)화 할 것을 요구한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매일 비우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48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취천하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이 말을 번역하면, "배움이라 함은 나날이 더하는 것이고, 도라 함은 날마다 던다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무위'란 하지 못하는 것(불위, 不爲)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 한다면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없다." 도를 닦는 것은 나날이 지식 또는 분별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비움이 지극해지면, 평화로워 지고 무위하여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지식은 밖에서 오고, 도는 안에서 온다.''

여기서 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말로 들린다. 비우며 살자. 욕심내지 말자. 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느리게, 편안하게, 천천히 생을 만끽하며 그냥 시시하게 살리라. 노자에 따르면, 배우면 생활의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만 늘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절학무우" 다음 문장이 잏은ㅐ가 된다.

唯之與阿(유지여아) 相去幾何(상거기하), ‘예(唯, 정중히 하는 대답)’라는 말과 ‘응(阿, 낮추어서 하는 대답)’이라는 말은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善之與惡(선지여악) 相去若何(상거약하),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도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유교적 학문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예’와  ‘응’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선과 악도 유교에서는 엄격하게 구분하라고 가르치지만 노자는 그 차이란 동전의 앞 뒷면처럼 본질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정중한 대답과 오만한 응대.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원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은 결국 '본질론자들'의 이분법적인 발상이다.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이분법적 의식의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이처럼 딱 부러진 흑백 이분의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시를 한 편 읽는다. 어제 오후는 딸을 데리고 꽃 구경을 나갔다. 거리의 봄꽃들은 코로나-19를 무서워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척척 한다. 떠날 때 떠나고, 등장할 때 시간 맞추어 제 때 등장한다. 꽃들은 저 마나 피어나고 지는 모습이 다르다. 동백은 한 송이 개별 자로서 피었다가, 주접스런 꼴 보이지 많고 절정의 순간에 뚝 떨어지며 진다.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었다가 노을이 스러지듯 살짝 종적을 감춘다. 나무가 숨기고 있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 목련은 도도하게 피었다가 질 때는 지저분하다. 목이 부러질 듯이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리며 뽐내다가 질 때는 남루하다.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한꺼번에 뚝 떨어지지 않고 잎 조각들로 느리게 사라진다. 온갖 추한 모습을 보이며,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복효근)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매화꽃, 벚꽃, 복사꽃, 배꽃은 풍장을 한다. 꽃잎 한 개 한 개가 바람에 흩날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풍장(風葬) 1/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거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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