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수련의 2단계는 '나 자신을 유기(遺棄, 내다 버림)하는 일'이다. 여기서 '유기하는 일'은 자신의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이다. 자신의 자의식을 살펴보고, 그걸 극복하는 일이다. 장자가 말하는 '나를 장례 시키는' "오상아"의 개념이라고 본다. 나는 내가 힘들 때는 마음 속으로 "I'm nothing(나는 무아)"라고 생각하며,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처리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배철현 선생은, 언젠가 자신의 묵상 글에서, 이기심의 여섯 자식을 말해준 적이 있다. "자기 중심이라는 이기심은 다음 여섯 가지 상처를 자신들의 표정, 말 그리고 행동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이 상처들은 육욕, 분노, 탐욕, 망상, 자만심 그리고 시기다." 이런 이기심을 버리려면, 비겁하지 말고 용기를 내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을 단순하게 재배치하고, 일상을 지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비겁(卑怯)은 "지옥 조차 거부한 최악의 죄"이다. 우리는 최적의 삶을 위한 전략과 기술이 없는 자를 '겁쟁이'라 한다. 겁쟁이은 만난 적도 없는 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도망친다. 그를 겁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겁쟁이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위한 전략과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
좋은 예가 지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자기 안의 욕심을 발견하는 과정이 있어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단테의 <신곡>이다. 이 작품은 '지옥(34곡)', '연옥(33곡)' 그리고 '천국(33곡)'으로 구성된 100편의 노래이다.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 직접 등장해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을 여행한다. 그들이 아직 지옥의 문을 통과하기 전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분노와 고통과 절규였다.
<신곡> 제3곡 "선생님! 지금 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베르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다." (제3곡 34-39)
이들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인생 최우선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하지도 않았고, 나쁜 일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주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몰라 그저 하루하루 현상 유지를 위해 연명한 폐품들이며,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자들이다. 단테는 그들을 지옥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치욕도 명예도 없이 미지근한 슬픈 영혼"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지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로 상관 없어 보이는 수많은 정보들을 의미 있는 단위로 배열하는 기술을 그리스어로 '태크네(techne)'라고 불렀다. 나는 이질적인 것들을 솜씨 있게 엮는 일을 '배치'라 부른다.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에 따르면 '편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테크네는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정보들을 일관된 전략으로 묶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전략이란 최적화된 정보의 나열이다. 그런 테크네는 예술적인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의 깊은 관찰을 통해 탄생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한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가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삶을 위한 전략과 기술이다. 인간은 모두 이 전략과 기술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영웅이라고 한다. 많은 예술 작품들이 모두 이 영웅들의 은유적 표현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작품들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일깨운다. 우리가 그 작품들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영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자신만의 전략과 기술로 대결해서 항상 승리를 거둔다. 우리는 이 영웅들의 승리 방식을 용기라 부른다. 그 반대가 비겁이다.
매주 일요일은 서양 고전을 통해 수련을 하는 날이다. 오늘 아침은 늘 하던 산책길보다 더 멀리 갔다. 그러다가 오늘아침 사진 같은 회화나무를 만났다. 그냥 길을 계속 간 것은 아니다. 나는 회화 나무가 궁금했다. 봄을 맞아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나무들은 이미 우듬지(나무 줄기에서 가장 꼭대기 부분)부터 푸르름을 입어가고 있는 데, 아직도 나이 든 회화 나무는 겨울이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가 지향하는 유일한 방향은 하늘이다. 수간(樹幹)에서 가지를 내고 입을 내지만, 그것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안정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에, 좀 더딜 뿐이다. 회화 나무 아래서, 낭송하시는 분들이 좋아하는 김현태 시인의 시 낭송을 유튜브를 통해 서수옥이라는 분의 목소리로 들었다.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김현태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이란
잠자리 날개가 바위에 스쳐,
그 바위가 눈꽃처럼 하이얀 가루가 될 즈음,
그때서야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이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등나무 그늘에 누워
같은 하루를 바라보는 저 연인에게도
분명,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눈물겨운 기다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겨울 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람 안에 또 한 사람을 잉태할 수 있게 함이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나무와 구름 사이
바다와 섬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 천, 수 만 번의 애닯고 쓰라린
잠자리 날개 짓이 숨쉬고 있음을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은,
서리처럼 겨울 담장을 조용히 넘어오기에
한 겨울에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먹구름처럼 흔들거리더니
대뜸, 내 손목을 잡으며
함께 겨울나무가 되어줄 수 있느냐고,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에,
눈 위에 무릎을 적시며
천 년에나 한 번 마주칠
인연인 것처럼
잠자리 날개처럼 부르르, 떨며
그 누군가가, 내게 그랬습니다.
다시 오늘의 화두인 '비겁'으로 되돌아 온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 했던 것처럼, 지옥조차 거부한 최악의 죄인 비겁한 자를 우리는 겁쟁이라 부른다. 그는 최적의 삶을 위하 전략과 기술이 없는 자이다. 겁쟁이는 만난 적도 없는 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도망친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포가 그를 겁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단테는 이런 겁쟁이들의 행위를 이탈리아어로 '윌타'라고 했다. 이는 '소심함'을 뜻한다. 그들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임무를 알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단테는 이 겁쟁이들을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했다.
세익스피어는 "비겁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여러 번 죽습니다. 용감한 자는 한 번 죽습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어느 편에 서지 않는 중립적인 행위는 비겁이라 정의한다. 그가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남겼다는 말이다. 배철현 선생의 멋진 책 <수련>에서 다음을 재 인용한다.
"저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할 때 마다, 그런 고통과 창피를 당하는 장소에서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은 폭력의 주동자를 독려합니다."
비겁의 반대가 용기(勇氣)이다. "나에게 흠이 하나 있다면, 내가 얼마나 끝내 주는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하메드 알리) 난 안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좀 더 자신을 믿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더 자주, 더 우연히 행복을 마주할 수 있다. 답은 자신 안에 있다.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 여럿이다. (1) 상대방은 아무 생각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2) 스마트 기기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집중력이 3초 수준이다. (3) 남들이 뭐라 하던 자신의 스타일대로 사시는 분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내는 것을 "자기 수용"이라고 한다. 기시미 이치로가 쓴 <미움 받을 용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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