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7일)
1.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채우는 힘"에 대해 성찰을 한다. 온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랑은 대개 관념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참극을 보면서 애달파 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가슴 아파한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아픔에 눈을 돌리며 똑같은 탄식을 반복한다.세상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는 자신이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인터넷공간에만 머물고 있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우리가 유지하고 싶은 일상의 공간에 그들이 틈입할 때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경계심을 품고 대하거나 마음의 담을 쌓아 그를 밀어내려고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많다.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당시 절대왕권이 있던 세상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시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의 몸의 부활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던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게 기꺼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 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긍휼이란 단어를 나의 앱 <모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이다. 나는 방점을 '돕는 것'에 찍고, 나의 '긍휼 정신'을 반성해 보았다. 불쌍히만 여기고, 돕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 찬바람처럼 불어왔다. 긍휼을 한문으로 써보아도, 언뜻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의 영어 표현이 compassion, mercy였다. Compassion을 우리는 '연민'이라 하고, mercy는 '자비'라 한다. 이 mercy의 동의어가 humanity(인간성, 인성)이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성이다. 인성을 키우려면 긍휼하는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mercy이다. 여기서 나오는 인(仁), 어진 마음이다.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에로스라 한다. 나는 이 에로스를 '생명 력'으로 풀이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되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고,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모르나 상대방을 주인으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정신이다.
2.
세상의 아픔을 차마 보고 넘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지기도 하면서도 고통을 받는 이웃들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당위(當爲)와 곤경에 처한 이들과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 자아 사이에서 바장인다. 부질없이 오락가락 거닌다. 당위는 '마땅히 그래야 하거나, 또는 마땅히 그렇게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요구되는 것. 칸트 윤리학에서는 정언적 명령(定言的命令)을 의미함. 졸렌(Sollen)' 이다. 조금 씩이라도 당위의 방향으로 몸을 틀 때 새로운 사람의 지평이 열리건만 대개는 옛 삶의 끌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당위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양심을 괴롭힐 때 우리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즉 핑계 거리를 찾는다. 고통을 개별화 시키거나,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변방에 머무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국가 전체의 안위가 걸려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실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의 해체이다. 한사람의 희생을 국가나 조직의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다는 논리는 악마적이다. 희생되어야 할 개인 가운데서 자기들은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전체주의적 사고이다.
3.
헤겔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얼마나 비양심적인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들어준다. 막강한 적들이 도시를 점령한 후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적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 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상황이 위급할 때면,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쓸 때 우리는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추상적인 사랑 담론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 하나에게 성심을 다할 때 신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신뢰 사회의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 세상엔 나를 지지해 줄 그 누군가가 있다.
▪ 난 나의 지지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연결될 수 있다.
▪ 세상은 나를 거짓되게 말하는 사람의 거짓을 가려줄 수 있다.
▪ 세상은 타인의 진실성을 검증해 줄 수 있다.
4.
'신뢰'는 동양에서 흔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거론되는 다섯가지 덕(德)이다. 이 '오덕'은 활을 쏘고, 창고를 살피고, 전투를 하고, 결제를 하는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들의 기둥이다.
인문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밥을 주지 않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기능에 갇히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선이 높으면, 눈이 높으면 효용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을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한다. 탁월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쓸모 없음의 쓸모를 본다. 도(道), 아니 '육바라밀'같은 최극 점을 추구하면, 세계 흐름에 통달하게 된다. 그 때, 정확한 판단과 정책을 펼 수 있다. 도나, 맥락이나 신뢰나 독립이나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눈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용(無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능적인 거의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결국 대용(大用)을 이루게 한다.
그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우리 사회 전반에 신뢰가 무너졌다. 사회의 리더들이 자기가 한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원칙보다 기능이 더 커 보이는 한 개혁은 흔들린다. 기능에 의존한 채, 개혁을 이룬 예는 없다. 예컨대 기능적 정치, 즉 정치 공학을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정치 자체의 복원은 힘들다. 정치공학으로는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저 사람을 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또 이 진영이 저 진영을 대체하거나 저 진영으로 이 진영을 대체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 세상처럼 보이지만, 새 세상이 아니다. 정치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짜' 정치는 아니다. 헌 세상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추상적인 사람담론 대신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 한 면에게 선심을 다하는 '다시 채우는 힘' 이야기를 하려 다가, 신뢰 사회까지 나아갔다. 오늘 사진은 지난 주 강원도 여행 중 <하조대>에서 얻은 것이다. 바다를 보고, "하지 않은 죄'를 고백했다.
하지 않은 죄/마거릿 생스터(캐나다 시인)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밤에 당신을 따라다니는 환영들이 그것이다.
당신이 치워 줄 수도 있었던
형제의 길에 놓인 돌
너무 바빠서 해 주지 못한
힘을 복 돋아 주는 몇 마디 조언
당신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었거나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말투.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모두 너무 크다.
너무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 주기에는.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5.
지난 4월 4일의 '헌재 선고'가 잊혀지지 않는다. 정리하는 마음에서 공유한다. 이젠 사회 대개혁의 시작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한 제도의 개혁이 우선 되어야 하고, 두 번 째는 성찰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위한 학교 문법의 개혁이 필요하고, 세 번 째로는 관료체제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본다. 관료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관료들이 헌법에 명시된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윤은 “국민의 신뢰를 중대하게 배반"했으므로 그를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이 공인됐다. 폭설을 맞으며 찬 바닥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을 생각하면 눈물겨운 판결이다. 인용이 예상됐지만, 혹시라도 기각이나 각하로 결정됐다면 그 엄혹한 세월을 또 어떻게 견딜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시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인용 선고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탄핵 소추단의 치밀한 준비가 크게 작용했겠 지만, 판결문처럼 성숙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이뤄낸 승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판결문은 분명히 지적했다. “신속하게 비상계엄이 해제된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계엄군의 소극적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독재의 인습을 버리지 못한 미 발육 정치를 성숙한 민주 시민들이 막아냈고, 헌재는 이를 제대로 인식했다.
6.
이젠 통합을 이야기 하며,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는 반민주 극단주의자들은 척결하여야 한다. 단순히 통합만을 주장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흐름이 있다. 탄핵 반대 집회는 이미 힘이 빠지고 있다. 적어도 윤에 대한 지지로 보수 집회가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극단 세력은 다른 대안을 찾아 집결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민주 세력까지 통합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반민주 세력까지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사회제도는 유지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반민주 세력을 용인한다면, 민주주의는 왜 그토록 봉건제와 독재에 맞서 저항해왔는가. 반민주적인 주장을 할지라도 최소한 그 절차와 방식은 민주주의 틀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제도는 그 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반민주적 극단주의는 통합의 대상이 아니라 해소의 대상이다.
7.
더 근본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건 과학기술과 언론이 과거 어느 때보다 발전한 현재의 대중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고 지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이 성찰적 지식으로 이어지고 걸러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왜 최근에 와서 극단주의가 횡행하는가? 광장이 열리고 시민의 참여 기회가 넓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탈진실과 확증편향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소문과 가짜뉴스에 속기도 하지만 자기 신념에 이용하면서 확신하기도 한다. 대중이 어리석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성찰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결여이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와 비뚤어진 경쟁 위쥐의 학교 문법 때문이다.
성찰적 지식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지식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책임도 크다. 그들의 비학문적, 비교육적 그리고 비민주적 행태들이 이 현상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문제는 지식인의 권위 추락이 아니라 지식의 권위 상실이다. 그리고 정보와 지식의 홍수라는 사회 변화도 물론 중요한 요인이다. 누구나 학교와 지식인을 통하지 않고도 쉽게 정보를 습득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인간적 덕목과 사회적 가치가 올바로 서 있어야 가능하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의 변화를 돌아보면 문제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출세와 성장 위주의 교육과 문화가 크게 작용했다. 초중등 교육은 대학 입시에 매몰되고, 대학 교육은 상업화돼 취업 학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성찰적 지식을 함양하고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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