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7일)
4월도 화살처럼 날아간다. 벌써 7일이다. 주일 아침으로 어제 딸과 저녁 만찬을 하였더니 영혼이 충만하다. 그런데, 가게에 손님이 없어 불안하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자.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1년 전에 만나기를 예상했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만난다. 나의 경우, 최근에 <예술사랑 토파즈>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한 무더기의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이 걱정과 불안은 1년 전에도 짐작했을까? 그렇지 않다. 현 정권이 이렇게 엉망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1~2년 전에 현재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면, 1년 후의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현재의 흐름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며,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래왔듯이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사실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평하고 후회하면 걱정은 현실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어려움을 바탕으로 어려운 미래에 대해 선제적으로 불평하고 한탄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현재, 미래 모두 크게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할 것인가? 그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아니 마음 먹는 방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걱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적인 걱정’과 ‘파국적인 걱정’이다. 생산적 걱정을 하는 사람은 미래의 실패를 예비하며 플랜 B를 준비한다. 이때의 걱정은 오히려 그 사람의 경쟁력이 된다. 문제는 파국적 걱정이다. “~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만 쳇바퀴처럼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런 파국적 걱정의 처방전은 질문을 “~하면 어떡하지?”에서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지?”로 바꾸는 것이다.
시인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마음은 우리 자신의 처소이며 그 안에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썼다. 중요한 건 걱정이 없는 삶이 아니라 걱정과 잘 공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걱정의 먹구름 속에 있다면 먹구름 위에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세네카의 말처럼 가장 비참한 건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미 불행해져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의 불 만족스러운 측면이 계속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미래에 대해 문득 걱정을 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를 어느 정도 즐기고 있어도 과연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든, 가지고 있든, 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에 대한 걱정은 먼지처럼 쌓인다. 이런 고민이 짙게 쌓일 때, 우리는 '왜 남들에 비해 내 삶은 왜 이리 힘든가'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은 다 순조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갖춰진 채 시작된 것 같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 나 혼자만 놓여 있는 것 같다. 걱정은 결국 현실이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하게 된다. 우리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이런 저런 걸 했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깊은 그리움에 휩싸인다. 이것은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앞으로 더 많은 걱정이 뒤따르게 된다. 이건 실존의 문제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저자 그램 데이비는 걱정이 올림픽 종목이라면 집 안에 금메달이 가득했을 거라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걱정은 유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다. 실제 연구는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1%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무능이 탄로 날까 봐, 지각하거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수시로 걱정한다. 모든 걱정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걱정의 포로가 되어선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만난 이야기이다. 그때 적어 두었던 것을 공유한다. 데일 카네기의 책 <<자기 관리론>>은 존스 홉킨스 의대를 설립한 윌리엄 오슬러 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의사 자격 시험도 제대로 치를 수 없어 두려워하던 이 평범한 청년의 미래를 바꾼 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눈앞에 분명히 놓여 있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토머스 칼라일의 문장을 새기면서였다고 한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눈앞에 분명히 놓여 있는 것을 행해야 한다.” 걱정이 찾아 오면, 나를 구해주는 문장으로 늘 기억하려 한다. 걱정과 생각은 다르다. 생각은 인과관계를 따져 내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다. 하지만 윌 로저스의 말처럼, 걱정은 흔들 의자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직 내일은 시작되지 않았고, 오늘은 끝난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마스 칼라일은 <주의 기도문>이 어제 먹어서 딱딱해진 빵이나, 밀 농사를 망쳐 먹지 못할 빵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말로 전달된다는 걸 기억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빵이 오늘의 빵이란 의미다.
일상에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걱정을 더는 길이다.
- 걱정 거리가 생기면, 나는 '나'를 '그'라는 주어로 바꾸어 놓고 <인문 일지>를 쓴다.나를 3인칭으로 놓고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의 급격한 전환은 걱정에 휩싸여 흙탕물이 된 상황에 높이와 넓이를 부여한다. 시간이 지나면 흙탕물은 가라앉는다. 문제는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있다. 그 시간을 잘 견디면 ‘성공’은 아니더라도 ‘성장’은 할 수 있다. 의도적인 시점 전환은 걱정을 줄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 걱정이 많을 때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휴식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며 자신의 불안에서 한 발짝 물러서기 때문이다. “저 사람도 힘들구나. 나만 헤매는 건 아니구나”라고 자신의 불안을 주인공에게 투사해 ‘짓눌린’ 감정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다시 되새긴다.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한다.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제 주말 텃밭에 나갔더니, 봄들이 수작을 걸었다. 봄은 수작의 계절이다. 무당 벌레뿐이겠는가? 겨울잠에서 깨어난 꿀벌들이 봄꽃마다 수작을 건다. 아니, 꽃들이 수작을 건다. 꽃잎은 식물의 광고판이다. 네온처럼 반짝이는 허니 가이드가 곤충을 잡아 끈다. 매화의 속눈썹과 복사꽃의 분홍 뺨을 보라. 아무리 바쁜 꿀벌도 안 들르고는 못 간다. 꿀 술 한 모금 마시고 꽃가루 택배 받아서 다음 꽃으로 간다. 진화의 과정에서 식물은 수작으로 꽃을 준비했다. 수작은 관계의 시작이다. 꽃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꽃의 수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허튼 수작이라도 봄에는 용서할 만하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멋진 덧붙임이다.
수작(酬酌)은 원래 '술잔을 서로 주고 받음'을 뜻한다. 수酬자는 '받은 술잔을 되돌려주며 권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작酌자는 '술을 잔에 따르는 일'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수작은 상대에게 잔을 권하고 곧 술을 권하여 따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작이 '남의 말이나 행동을 업신여겨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 술자리에서 은근한 말을 주고 받거나 또는 술자리에서 한 말이 실속이 없기에 그 뜻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술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작(酬酌)을 즐겼다. 따라주는 술을 정(情)으로 알았고 술잔을 돌려 마시며 일심동체의 우정을 다졌다. 즉 같이 술을 마시는 대상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존재로 통했다.
아름다운 수작/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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