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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도(大道)를 믿고, 오늘의 난국을 견디어 보고 싶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6일)

이어지는 오늘 아침 <인문 일기>는, 비우고 비워 더 비울 것이 없는 텅 빈 경지에 이르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는,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제16장)을 위해, 노자 읽기를 한다. 오늘 읽을 제18장을, 좀 먹물을 먹은 사람들은 "윤리적 차원의 한계", 반면 젊은 학자들은 "화목한 가정에는 효자가 없고 화평한 국가에는 충신이 없다"는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로 해석한다. 도올도 그냥 단순하게 유교적 덕목에 대한 안티테제(반대명제)로 읽기 보다는 인의(仁義. 사랑과 정의)라든가 효(孝)와 자비(慈悲)라든가,  충의절개(忠義節槪)라든가 하는 것이 유교적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덕성으로서 필요한 가치라는 상식적 사유 속에서 그 근원을 탐색하여 그러한 일상적 덕목이 절대적 선으로서 우리를 지배해서는 아니 된다는 일종의 가치전복(價値顚覆, transvaluation)으로 읽었다. 그 원문가 해석이다. 상대적으로 짧다.

大道廢(대도폐) 有仁義(유인의), 큰 도가 사라지면, 어짐과 의로움가 있게 되고
慧智出(혜지출) 有大僞(유대위), 지혜가 나타나나, 커다란 위선이 판을 친다.
六親不和(육친불화) 有孝慈(유효자),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효와 자애가 있게 되고
國家昏亂(국가혼란) 有忠臣(유충신), 나라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게 된다.

인(仁, 어짐, 사랑)은 '인(人)과 '"이(二)'가 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윤리적 특성이라 풀이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사람 답게 해주는 '사람됨'이라 할 수 있다. 그걸 우리는 또 인성(人性)이라 한다. 의(義)는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는 마음으로 풀이한다. 유교에서는 무엇을 할 때 이(利)가 된다고 하여 하는 행동과 이해(利害)에 관계없이 오로지 옳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구별한 다음, 이해 관계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옳다고 여겨지면 하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의에 입각한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소인배이고, 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군자의 행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호리피해 好利避害(나의 이익만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것)를 양심적으로 경영하여, 호선오악 好善惡惡(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만을 보여주는 우주의 질서를 따라 일상을 운전하는 것이 군자의 행동이라 한다.

"혜지(慧智)"는 인간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얻어진 분별지나 이성적 지식 혹은 일상적 의식의 한계 내에서 머리를 짜내어 얻어진 지략(智略)을 뜻한다. 전체 자연계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는 개인과 사회를 추구하는 노자의 철학체계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덕목들은 제한적 조건 위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런 덕목을 인위적 고안품으로서 자연의 대도(大道)를 모델로 하는 방식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노자는 인위(人爲) 또는 유위(有爲)를 부정하고 무위(無爲)를 주장한다. 위(僞)는 허위일 수도 있고, 인위일 수도 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자연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자연은 변화와 관계 속에 있다. 그런데 인위적인 지적 활동은 일정한 체계를 근거로 어떤 특정 대상을 다른 것 들로부터 고립시켜서 부각시키는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지혜라는 지적 활동을 통해 허위나 인위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다음 문장의 "육친(六親)"은 나와 부, 모, 형, 제, 아내, 자식 가족 구성원들이다. 효(孝)는 자식이 부모에게 드리는 사랑이고, 자(慈)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뜻한다. 이러한 효와 자는 가정에 질서가 없기 때문에 제창되는 덕이라는 것이 노자의 뜻이다. 만일 인간의 자연적인 심사가 지연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면 이러한 효나 자에 대한 강조는 아예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에서 충신(忠臣)을 강조하는 것도 국가가 혼란스러워 충신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인(仁), 의(義), 효(孝), 충(忠)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어질고 의로운 개인,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 자식을 자애로 보살피는 부모, 국가에 충성하는 신하는 유교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인간형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유교적 가치체계를 뒤집는다. 대도(大道)가 실현되면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국가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굳이 인위적인 도덕률을 도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닮은 밝은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므로 구태여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가정도 부모, 자식, 형제가 제 자리를 지키면 저절로 화목 해지므로 효도니 자애니 하는 덕목을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국가도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 지도자가 무위의 리더십으로 다스리면 저절로 질서가 잡히므로 충성스런 신하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라 좀 어렵지만, 이 장을 소개한 한 블로그(https://m.blog.naver.com/chamnet21)에서 읽은 것인데, 제18장에서 노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금방 이해하게 한다. "기업이 건강하면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인위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컨설팅도 필요 없다. 회계처리를 투명하게 하고, 기술개발과 인재육성을 열심히 하면 요란스럽게 광고를 하거나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서 경영진단을 받지 않아도 기업의 미래는 저절로 밝아진다. 홍보를 대대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품과 서비스에 자신이 없다는 증거이며 경영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기업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스타벅스는 미디어 광고를 일체 하지 않는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를 동원한 스타마케팅도 하지 않는다. 거기에 들어갈 비용을 실내장식이나 제품의 품질 유지, 종업원들의 후생복지 등에 쓴다. 그렇게 해서 매장을 찾는 고객들과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들의 입소문으로 자연스럽게 홍보를 대신한다. 이런 무위의 전략으로 스타벅스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번 더 말을 보탠다. 실제 사회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구태여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랑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만큼 사랑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셈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일수록 도덕이 더 거론되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일수록 종교가 더욱 성행하게 된다. 마치 강력한 약이 많고 용한 의원이 많다는 것은 그 사회에 아직 질병이 많다는 것을 증거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 대도(大道)를 믿고, 오늘의 난국을 견디어 보고 싶다. 그래 천양희 시인의 <견디다>를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사진도 사람이 인위로 고통받는 나무들이 견디고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견디다 보면, 자연의 되돌아감을 볼 수 있다.

견디다/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헌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 년에 단 한 번 꽃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 펠리시아 꽃과
물 속에서 천일을 견디다 스물 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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