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6일)
2025년 봄, 여러분 모두 "폭싹 속았수다". 이 말은 수고하셨습니다. 제주 방언으로 '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지난 해 12월 3일부터 얼어붙었던 사회가 다시 녹아 내리는 것 같다. 정국을 불안정하게 잡아맸던 가장 큰 고리가 4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풀렸다. 일찌감치 눈이 녹고 봄이 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편한 요즘이었다. 탄핵 찬성과 반대 집회로 민심이 갈려 이전에 목격하지 못했던 폭력적 장면들을 지켜봐야 했다. 특정인에게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사회 곳곳이 심하게 멍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기력했다. 이제 탄핵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시작해야 할 때다.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이 의미 있는 것은, 한국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전세계에 보여줬다는 점 뿐 아니라 유혈 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3일 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서구에선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보여준 민주주의 열정과 복원의 과정은 전세계에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 오늘 아침부터는 김기석 목사님의 책, <<최소한의 품격>>의 3부인 <다시 채우는 힘>을 읽으며, 나부터 "새로운 삶의 문턱을 밟고 나아가기 위한 사유와 성찰"을 해 본다.
1.
책을 읽어야 한다. 스마트폰을 잠시 꺼두고 책을 읽어야 한다. 지금은 가벼운 읽을 거리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실용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이도 있고, 위안을 얻고 싶어 책을 읽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독서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인식을 확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소 힘에 부치는 책을 선택해보는 거다. SNS 글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런 글을 만나면, 노트에 적어 둔다. 몇 줄 읽거나,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 던지고 싶은 글과 책들을 마치 광부가 금맥을 찾아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파고 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확장된 인식의 지평을 글로 쓰다 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는 말마다 '아름다운'이란 형용사를 붙인다. 예컨대, '아름다운 바람'이라 말하는 순간, 정말로 바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감정이 바뀐다. 감정은 마음의 느낌이다. '아름다운'이란 말을 힌두어로는 '순다르'라고 한다. 프랑스어로는 '보(beau)'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 이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넣어본다. 단어가 새롭다. 이렇게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면, 그 단어가 자주 눈에 뛴다. 그 단어가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지만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문맹이다. 특히 모국어와 함께 성장하고 그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면서 슬프게도 우리는 많은 단어들을 상투 화하면서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사용하거나, 아예 모른다. 그 말의 소중함을 잃어 버린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이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결정하며 사물을 보는 시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과 감정을 결정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기도 한다. 내가 낯선 단어와 문장들에 익숙해 가는 동안,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인식의 지평도 확장된다. 언어가 의식을 바꾼다.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지, 무엇을 듣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지, 무엇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 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싫어한다'는 말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하루살이와 나귀/이영
-해 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 줄래?
하루살이가 나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안 돼.
내일도 산책 있어.
모레, 모레쯤이 어떠니?
그 말에 하루살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섭니다
-넌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2.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 말했다 한다. 작가의 그런 열정을 글 속에서 알아차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안대희가 쓴 <<정조치세어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난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첫째로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들이 펼쳐 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본다. 둘째로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한다. 셋째로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 거닐고 조화의 오묘한 비밀을 캐낸다. (…) 이것 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 나도, 정조처럼, 와인을 팔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하니, 인문 운동가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 경전 및 고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우주와 그 사이에 있는 인간들의 비밀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 그러면서 문제의 대안을 찾아 해결하는 활동을 작은 범위에서부터 게을리 하지 않는다.
▪ 그 내용들을 글로 쓰며,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3.
독서 행위에 대한 가슴 뛰는 문장을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했다는 말이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 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move), 활력을 느끼게 하고(animate), 흥분 시키는(gets me excited)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 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 에요." 독서 행위는 수동적인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작가와 더불어 적극적인 이해의 과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삶과 세계 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심화는 우리를 편협성의 늪으로부터 건져준다. 욕망의 바다를 는적거리며 헤매기보다는 인식의 관야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거다. 음식이 몸의 양분이라면, 독서는 영혼의 밥이다. 그런 면에서 책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잘 먹고, 잘 씹고, 잘 소화 시켜야 영혼이 건강해 진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이 살찔 정도로 건강하지 않으면 균형이 깨진다. 건강해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 기쁨이 잘 유지되어야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일상에 잘 배치되어 자주 느껴야 행복하다. 지난 주 강원도 여행 길에서 <오죽헌>에서 이 율곡과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만났다. 율곡 이이는 '구원(성인聖人이 됨)'을 산의 등산과 비유하였다. "산을 만나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산이 있다 더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 산을 제 눈으로 올려 다 본 사람, 그리고 직접 산을 밟고 올라가 땀을 훔치며, 눈에 가득한 전망을 누리는 사람이 그것이다." 1단계가 독서이고, 2단계가 이해, 3단계가 체화(體化)이다. 불교에서는 이 3단계를 '문(問)/사(思)/수(修)'라 한다. 문사수(聞思修), '들을 문', '생각 사', '닦을 수'. 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러고 나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것이다. 지난 주 강원도 여행 중에 만난 이 율곡의 <자경문(자경문)>을 공유한다.
▪ 입지(立志): 뜻을 크게 갖고서 성인(聖人)의 삶을 따른다.
▪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이 적으니, 말을 적게 한다.
▪ 정심(定心): 마음이란 살아있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정신을 한데 모으고 담담하게 그 어지러움을 살핀다. 그렇게 마음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 근독(謹篤): 홀로 있을 때 헛된 마음을 품지 않는다. 모든 악은 홀로 있을 때 삼가지 않음에서 비롯되니, 마음속에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 독서(讀書): 앉아서 글만 읽는 것은 쓸데없다. 독서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겠지만, 일이 있을 땐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합당하게 처리한 뒤 글을 읽는다.
▪ 금욕(禁慾):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는다. 일을 할 때 대충 편하게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 진성(盡誠): 해야 할 일은 모든 정성을 다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마음속에서부터 끊는다.
▪ 정의(定義): 불의한 일을 단 한번, 무고한 사람을 단 한 명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 감화(感化): 누가 나에게 악을 행하면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돌아본 뒤 그를 감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들이 착하고 아름답게 변화하지 않는 것은 내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나 자신을 돌아본다.
▪ 수면(睡眠): 몸에 질병이 있거나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아니면 눕지 않는다. 비스듬히 기대지도 않는다.
▪ 용공(用功)> 공부는 죽은 뒤 에야 끝나는 것이니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는다.
4.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과 SNS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정확히 말해, 알고리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빨리 이동한다는 연구도 있다. 거짓이 진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것은 인류가 ‘혐오, 전쟁, 살인, 성범죄’ 같은 단어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라 한다. 주식 폭등보다는 폭락이, 스타의 결혼보다 이혼 기사에 먼저 반응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선플 속에 단 하나 악플만 있어도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린다. 불행히 인류에겐 선천적 ‘부정 편향’이 있다. 위대한 석학들은 이런 편향을 바로잡으려 수많은 시도를 했다. 다만 이 시도는 번번이 우리의 편향성을 증폭하는 다양한 알고리즘에 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위험을 알아차리고 피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답고 행복하게 하는 건 폭력과 혐오가 아닌, 긍정과 공감임을 깨달어야 한다. 잡초는 제거하지 않으면 무성하게 자라 우리를 살리는 곡물을 결국 초토 화한다. 잡초는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란다. 폭력과 혐오 역시 그렇다. 공감이 힘든 건, 물을 주고 거름을 줘야 자라나기 때문이다. 최진석 교수는 <책 읽고 건너가기>의 한 토크쇼에서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책 읽기, 글 쓰기, 운동 그리고 여행"이라 했다. 동의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여행과 독서는 똑같이 나를 생경한 다른 환경으로 몰아넣고서 흔들리게 한 다음, 결국 나를 만나게 한다"고 말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만난 자가 '자유로운 자'라 한다.
5.
독서는 새로운 능력을 학습, 지능을 어떻게 확대하는지 명확이 보여준다. 던지기가 사냥을 위한 고도의 신체 기술이었 듯이 읽기는 뇌 속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신생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의 양극 화'보다 두려운 것이 '지(知)의 양극 화'이다. 많은 사람이 자동화로 인한 인간의 위기와 부의 양극화를 걱정한다. 그런데 실상 그 못지않게 우려해야 할 게 '지의 양극 화'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짧고 쉬우며 직관적인 이미지에만 반응하면, 자칫 사고마저 얕고 단순해질 수 있으며, 이를 방치하면 획일적 대중과 창의적인 소수 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경우, 가짜 뉴스와 선동을 앞세운 포퓰리즘의 위험도 커질 것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창의적인 소수도 안심할 수 없다. 그런 양상은 이미 지식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표면화되고 있다. 독서는 인간이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는 도약대이다. 하지만 이 마법의 기술은 얕고 가벼운 공짜 오락물을 앞세운 또 다른 기술들의 파상 공격으로 주춤거리는 중이다. 어떤 신기술도, 그 기술이 만들 새 세상도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그 너머'를 생각하는 능력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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