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21일)
고미숙의 책,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는 단지 글을 읽고 쓰는 방법만 이야기 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 나는 거기서 많은 통찰과 위로를 얻는다. 오늘 아침은 "뇌와 손과 혀의 유쾌한 삼중주" 이야기를 공유한다.
뇌는 운동을 위해 존재한다. 운동하지 않는 뇌는 뇌가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말하고, 읽고, 쓰지 않으면 뇌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뇌 운동의 핵심은 언어이다. 뇌는,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언어의 구조로, 언어의 회로를 따라 이합집산 한다.
뇌가 운동한 언어는 혀를 움직이게 한다. 성음(聲音)은 오장육부를 울리면서 터져 나온다. 신장의 물을 심장의 불로 펌프질 하면 폐가 끌어내서 밖으로 토해낸다. 이런 것을 우리는 '수승화강(水丞火降)'이라 한다. 그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혀이다. 심장과 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심장이 나빠지면, 그 증상이 설암으로 표현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아침마다 혀를 깨끗이 닦는다. 매일 닦으니까, 혀를 크게 닦을 일도 없다. 고미숙의 책을 읽으며, 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하여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원래 박자치라 노래를 못한다. 그런데 지난 2년 간 개인적으로 성악을 레슨 받았다. 가곡을 부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호흡이다. 그래 심장만이 좋아지는 줄 알았는 데, 노래를 많이 하면 혀도 발달한다. 혀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치망설존(齒亡舌存)'이란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단단한 이는 빠져도 부드러운 혀는 남는다는 뜻으로, 강한 자가 먼저 망하고, 유(柔)한 자, 즉 부드러운 자가 나중까지 남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혀는 먹고 마시고 키스하고 많은 활동을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활동은 역시 언어이다. 언어는 내부이면서 외부다. 나와 너, 나와 그를 연결하는 결정적인 통로이다. 그 언어가 이제까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젠 혀 보다 손이 중요해 진다.
문자가 발명되는 순간, 우리는 더 멀리, 더 오래, 더 깊이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말과 회로가 다르다. 문법, 문어체, 문장 등의 '배치'를 관통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역할을 손이 담당하기 시작한다. 말하기보다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쓰기의 최종 단계가 손이다. 뇌와 손과 혀가 마주치는 그 지점에서 바로 글이 탄생하였다. 위 이야기들 에서 '배치'라는 단어가 새롭다. 내가 인문운동을 시작한 것이 이 배치라는 단어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적어 본 적이 있다.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의 원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라고 한다. 이 정렬 시키는 일이 '배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그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 인문운동가로 나선, 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말하는 쓸데 없는 일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먹고 사는 일 이외에의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은 것이다. ‘아르스’는 하찮아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마치 그 솜씨가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아르스'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이 배치 기술은 문자가 나오고, 우리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그 빛을 발하였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이 재잘거림에 방향과 밀도를 부여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인식의 지도 그리기 이다. 인식을 배치하여 정돈하는 일이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다르다. 심장이 품고 있는 마음의 행보도 역시 혀를 통해 드러난다. 그래 혀는 쉼없이 말들을 토해내는 것이다. 문제는 혀가 거칠고, 산만한 말들을 뱉아내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면 욕설이나 헛소리, 즉 망언이 된다는 것이다. 아니면 지겹기 짝이 없는 동의반복에 빠지게 한다. 혀의 거칠고 지리멸렬한 흐름에 창조적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수행해야 할 훈련이다. 뇌 운동과 심장박동, 폐운동과 혀 놀림을 창조적으로 변용 하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뇌와 혀와 손이 삼중주로 움직여야 한다. 왜냐하면 손도 하나의 뇌이고, 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면서 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니까 직립은 앞발의 탈영토화이다. 앞발이 손으로 변주되는 것이 직립이다. 두 발로 서는 순간 뇌 용량은 폭발적으로 증식하고, 손의 활동성은 놀랍게 증대된다. 뇌가 수많은 신경망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손은 그 뉴런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쉼 없이 뭔가를 창조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위는 연결과 창조이다. 세 개로 말한다면, 접속, 연결 그리고 창조를 위한 배치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훈련은 두뇌와 손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손의 수고가 중요하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 우리 현대인들은 손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손의 수고를 잊고 살며, 남의 수고에 빚지고 산다. 그 뿐만 아니라, 손의 활동성이 커지자 사람들은 손으로 하는 창조를 오로지 물질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손을 오직 물건을 만들고, 돈을 세는, 요즈음 말로 하면 카드를 긁는 기능으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손이 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거룩한 작업이 쓰기이다. 쓰기는 물질도 정신도 아니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이다. 무형적이면서 유형이다. 내부적이면서 동시에 외부적이다. 쓰기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쓰려면 뇌와 손과 혀의 삼중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쓰기를 가장 어려워 한다. 왜 어려울까? 고전평론가 고미숙에 의하면, 글쓰기는 존재의 심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본래 면목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게임, 쇼핑, 웹툰, 미드, 온갖 중독적 행위에 몰입한다는 점이다. 일단 중독에 빠지면, 뇌와 손과 혀는 얼어붙어 버린다. 뉴런들은 연결되지 못하고, 혀는 욕설로 뒤섞인 감탄사나 광기 어린 말들을 토해 낸다. 혀가 먼저 미치고, 손은 팔이 아프 도록 클릭을 해댄다. 이렇게 살면, 당연히 아프다. 그 치유책은 뇌와 손과 혀가 매끄럽게 통하게 하여야 한다.
프로이트와 달리 그의 제자 융은 최고의 치유책이 글쓰기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통해 환자에게 병의 원인을 진단해 주었다면, 융은 환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뇌 와 손과 혀가 서로 연결되면서 말과 글이 창조된다. 그 말과 글들은 조각조각 쪼개졌던 신체의 감각들을 다시 연결해 준다. 그러면서 생의 의지가 되살아나면서 사유의 힘이 생성된다.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지도를 그릴 수 있으니, 우리는 그 지도를 가지고 한 걸음 씩 나아가면 된다. 오늘도, 나만의 언어와 문장을 만들어 매면서, 그렇게 한 걸음 내디딜 생각이다.
어제는 모처럼 해가 뜨고 날씨가 상대적으로 포근했다. 절기 상으로는 대한인데 말이다.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 치과에서 잇몸에 약을 넣어준 후, 한 시간동안 아무 것도 마시지 말고, 먹지도 말라 해서, 나는 집에 오는 길에 갑천 주변에 차를 주차하고, 산책을 했다. 오늘 아침 사진이 거기서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을 한 참 보다 보니, 안도현의 시가 생각 나서, 오늘 아침 공유한다.
겨울 강가에서/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이 주장하는 "글쓰기는 에로스의 힘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로 이어간다. 우주는 만물을 낳고 기른다. 인간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우주적 행위에 동참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낳고, 기르는 이 힘의 원천을 '에로스'라 한다. 에로스는 사랑이다. 그것은 남녀가 짝짓기를 통해 생명을 창조하는 큰 일을 하게 하는 거다. 당연히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만이 낳을 수 있다. 그 순간, 여성은 낳고 낳는 자연의 대순환에 참여하는 일이다.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생명과 우주에 대한 무한한 교감을 시도하는 것이다. 창조를 위한 여성들의 에로스적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러나 남성은 다르다. 기껏해야 전쟁과 사냥, 약탈과 정복을 할 수 있을 뿐, 그 때 사용되는 에너지와 힘은 에로스적 창조와는 비교 불가능하다. 위의 행위들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남성들이 자연의 창조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건 가치의 창조이다. 물질이 아닌 정신, 유형이 아닌 무형의 영역에서 인식의 지도를 그리는 것, 곧 진리 혹은 지혜를 생산하는 일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만을 느낀다고 했다. 생식하거나 생성하거나,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생식이 아이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생성은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신의 완전성, 자연의 법칙에 다가가는 길은 이 두가지 뿐이다. 그러니까 생명을 낳는 것과 가치의 창조는 분리될 수 없다. 니체의 이야기를 좀 들어본다. 예전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책을 읽으며, 이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좀 알 것 같다. 문해력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읽어야 는다.
"창조, 그것은 고뇌로 부터 나오는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가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희들은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여, 자신이 다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될 각오를 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생식을 통해 우주와 소통하고, 남성은 가치의 생성을 통해 자연과 감응한다. 이것은 차별이나 위계는 아니다. 하지만 제국의 확장 그리고 가부장제의 등장과 더불어 성적 불평등과 위계는 마치 보편적 원리처럼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남성은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멀어졌고, 여성은 생명을 낳는 것의 거룩한 의미를 망각해 버렸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주장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와서는 생식은 오직 화폐와 상품의 회로에 잠식되었다. 출산은 의료산업 혹은 인구정책의 일환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생명을 낳고도 우주적 환희는 없다. 양육에 드는 돈, 감정 소모, 경력 단절 등이 여성들을 짓누른다. 남성들은 에로스가 쾌락의 수단이 되었다. 문제는 쾌락이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쾌락은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을 무너뜨리는 오직 파괴를 향해 치달을 뿐이다. 그러니 가치 창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둘 다 창조 대신 소유, 생성 대신 쾌락이라는 블랙홀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대단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창조하는 것의 위대함을 자각해야 한다. 인간은 오직 생명을 창조하는 활동을 통해서만 우주와 연동한다. 그에 버금가는 행위는 오직 가치의 창조, 다시 말해 지혜의 생성 뿐이다. 그건 무지로부터의 해방, 인직의 지도 그리기 등의 생명 활동이다. 그건 글쓰기로 이어진다.
신이 언어로 계시를 내리고, 예언자나 수행자들이 언어로써 진리를 설파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가 감옥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인식과 사유를 얽어 맨다는 점에서 말이다. 나는 지난 해 7월 14일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질 들뢰즈는 그러한 정보 사회에 대해 이미 강한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그는 정보 사회의 비인간을 지적하면서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여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명령은 강제와 폭력을 감추고 있어 그것을 따르다 보면 인간은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상상력 없는 정치, 얇고 진부한 문화, 빈곤한 지성은 언어의 빈곤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적인 힘이 없이는 진정한 미래를 열 수 없다."
그렇다. 언어의 감옥을 폭파하고 탈주하는 것도 언어로써 가능하다. 이슬람의 알라는 "인간을 창조했으면 그에게 명확성을 가르쳤다," 명료하게 말하고, 명확하게 글로 전달하라는 것이 알라의 뜻이다. 그러니 천지가 만물을 낳고 낳는 그 마음을 진리라 부른다면, 그 진리에 다가가는 길은 가치의 창조에 있다. 가치의 창조는 쓰기 능력과 분리 될 수 없다. 써 보아야 생각이 명확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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