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9일)
우리는 놀 줄은 알면서 쉴 줄은 모른다. 우리는 실제 일상에서 내려놓는 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주로 '일을 해 나가는' 기술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만, 자신을 '내려놓는' 방식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긴장을 푸는 방법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최근에 잘 사는 방법은 긴장의 양과 이완의 양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삶은 그러니까 '균형 맞추기'이다. 비슷한 양과 질로 말이다.
이완이란 긴장을 푸는 일이다. 이는 진짜 '쉬는'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외부 자극 없는 시간 보내기'이다. 산책이 좋다. 아니면 명상도 괜찮다. 쉰다는 것은 삶을 건사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 불안과 우울, 압박감 같은 감정들을 다른 자극으로 눙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직시하고 다독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나는 몇 일전부터 공지영 작가의 최근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으며 큰 위안을 받고 있다. 이완하는 좋은 방법은 지금-여기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특히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지 못한다. 늘 비우려기 보다는 성취를 고민한다.자본주의가 꼬드기기 때문이다. 쉴 틈이 생기면 쉬는 게 아니다. 삶을 지탱하느라 들쑤셔진 마음을 다독거릴 재주가 없어 또 다른 자극을 주입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대신, 정신이 쏙 빠지게 단 콜라 따위를 물려준다. 질리고 움츠러든 마음은 달콤한 흥분으로 덧씌워졌지만 그게 진정한 이완은 아니다.
이런 식이다. 각성상태가 나를 피로하게 하지만 제대로 이완하는 법을 모르기에 마취를 택한다. 예를 들어, 삶을 지탱하느라 이어지는 흥분과 불안에 지친 상태에서, 말잔치만 이어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두거나 아예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먹방 따위를 본다. 혹은 SNS에 접속해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타인들의 삶을 지문이 닳도록 문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만들어 넨 알고리즘의 신에게 혼을 빼앗겨 무더기 같은 영혼으로 헤매다 동틀 무렵 어느 벌판에 쓰러져 잠들곤 한다. 홍인혜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다.
휴식, 진짜로 쉴 줄 아는 것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제대로 쉬려면, 일단 노동과 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의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소외와 압박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소외이고, 의지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압박이다. 그러니까 쉰다는 건 앞의 두 가지, 즉 소외와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쉰다고,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족은 감정노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배설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젠 그런 삶의 배치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노동의 스트레스와 감정의 배설로부터 벗어나는 활동 혹은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용히 혼자서, 내가 어떤 활동을 하면,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 소외와 압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지성을 중심으로 관계를 재구성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모임도 좋다고 한다. 특히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낭송이 몸을 이완시키는 데 최고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소프라노한테 배운 노래를 내 방식대로 큰 소리로 부르며, 가창력이 향상되는 기쁨을 느끼고, 악기를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는 기쁨이, 나를 몸과 정신으로부터 이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고 있다. 그래 나는 집 근처에 그런 장소를 갖고 있다. 나는 그 방 이름을 '세심실(洗心室)'이라 졌다
시 낭송도 좋다. 그래 나는 노래를 하다가 잠시 멈추고 시 낭송을 혼자 큰 소리로 한다. 소리가 나려면 신장의 물과 심장의 불 그리고 폐의 조절 능력이 동시에 적용되어야 한다. 오장육부의 순환에 아주 유익하다. 그런 측면에서 말은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다. 그래 같이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일상을 산다면 불행하다. 낭송하기 좋은 시는 안도현의 것이다. 오늘 아침 낭송하기 좋은 시를 공유한다. 어제 오전에 눈이 엄청 내렸다. "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백석)를 외우며, 동네 조그만 동산에 올랐다. 거기서 찍은 사진을 오늘 아침 고유한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 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아니면, 산책을 하면서, '멍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머리를 식혀야 하기 때문이다. 배승민이라는 의사의 칼럼에서에서 읽은 것이다. 공유한다. "어느 날 진료시간에 '쉴 때는 주로 무얼 하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학생까지, 그리고 그들의 부모마저 같은 답을 했다. '스마트폰 보죠 뭐.' 나 역시 업무 뿐 아니라 자투리 시간에도 언제 급한 연락이 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좀처럼 폰을 내려놓지 못하지만,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도 세대를 막론하고 천편일률로 단 하나의 방법만을 찾는다는 것은 우려가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스마트’하게 쓰지 않는다면 집중력까지 망치기 쉬운 썩은 동아줄 같은 그것이 모두의 유일한 도피처라니 말이다. "
수년 전 <멍 때려라>라는 책이 있었다. 그만큼 바쁜 현대인에게 뇌를 쉬게 하는 시간이 얼마나 절실한지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이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광범위하게 퍼진 인터넷과 스마트폰 문화 탓에 아직 말도 못 뗀 영유아까지도 멍 때리는 놀이 시간을 도둑맞고 있는 것 같다. 식당에서 어린 꼬마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집중하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의사 배승민의 쉬는 방법을 공유한다.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이런 식을 하는 것이다. "주차장같이 꽉 막힌 지루한 고속도로 출퇴근길, 아무리 바빠도 길 위에 갇혀 있는 셈이니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거나 창밖을 보며 쉴 수밖에 없다는 장점이 있다. 작년만 해도 미세먼지 가득한 퀴퀴한 날씨 탓에 창 밖이나 안이나 암울하기 그지없었건만, 요즘은 코로나 시대의 장점일는 지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가도 창틀이 액자로 보일 만큼 선명하게 빛나는 하늘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게 멍하니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창밖을 보다 보면, 어느새 지친 나를 저 하늘이 가만가만 위로해 주려는 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든다. 빈부나 지위와 무관하게 우리가 보는 하늘은 똑같은 곳에 있다. 잠시 뇌의 인위적인 과열을 식힐 겸 시간의 흐름이 선물해주는 풍경에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우리 뇌에 꼭 필요한 ‘멍 때리기’와 함께." (배승민) 나는 늘 다니는 탄동천 산책길에서 멍을 때린다.
이어서 어제에 이어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말하고 있는, "에로스는 로고스를 열망한다. 에로스는 생의 원동력이다"란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에로스 이야기를 하려면,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그가 말한 동굴의 비유를 알아야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한순간에(suddenly, 불현듯이-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 느닷없이)' 낯선 현실을 만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갑자기/한순간에',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다. 이 순간이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 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래야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이데아를 향한 갈망을 통해서 동굴 밖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그치면 플라톤의 사상은 단순한 용기에 대한 덕목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데아를 한 번 본 사람에게 '에로스'가 깃들어 숭고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면, 동굴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환영을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게 이데아의 힘이다. 자기만 이데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갈망과 에로스(숭고한 사랑)가 생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숭고한 사랑의 감정으로 동굴 안의 쇠사슬에 묶인 채 그림자를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것이 이데아의 힘이고, 이 힘으로 욕을 먹더라도 그들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힘이 에로스(사랑)인 것이다. 에로스 힘의 작동은 내가 이데아를 보려는 용기를 심어주고, 다시 동굴 안의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힘이다. 이게 플라톤의 에로스론이다.
그런데 이 에로스는 로고스를 열망한다. 에로스는 생의 원동력이다. 에로스는 타자를 향해 질주하는 힘이다. 무엇인가를 낳고자 하는 열망이다. 접속과 생성을 향한 생의 의지이다. 그런데 그 에로스는 사랑의 이름으로 일종의 카오스가 되기도 한다. 방향도 목적도 없는 격정에 가깝다. 짜릿하지만 위태롭다. 그래서 에로스에는 그 방향과 힘에 리듬을 부여하는 또 다른 힘이 함께 작동하여야 한다. 그게 로고스이다. 그건 앎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 에로스의 대상에 대해 알고 싶어 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늘 로고스를 열망한다. 로고스가 리듬을 잡아주어야 에로스가 쾌감이 아닌 환희가 된다. 쾌감은 성감대로 환원되는 전기 자극이라면, 환희는 몸 전체에 퍼져 나가면서 평온함으로, 또 집중력으로 변주되는 울림이다. 일상 생활에서 환희(歡喜)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만,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매우 기뻐함 또는 큰 기쁨이다. 불교에서는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기쁨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한다.
에로스, 숭고한 사랑이 생성시킨 많은 질문들에 답하려면,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타자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이 아니고는 타자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니고는 자신을 온통 뒤흔들어 대는 욕망의 배치와 유래를 가늠할 도리가 없다.
우선 사랑과 소유욕을 구별해 본다. 앎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소유욕이 앞서면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가지고만 싶을 뿐이다. 알고 싶다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 앎이 자신을 설레 이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러니싸 설레이게 하면 교감이고, 소유욕이 앞서면 쾌락이다. 서로 알지 못한다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맹목이고 폭력이다. 무지-맹목-소유-폭력-쾌락은 하나의 사슬이다.
그래 삶은 그 자체로 에로스와 로고스의 마주침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생성과 창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앎-사랑(에로스)-이해-생성-창조도 하나의 사슬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니체의 말을 함께 읽어 본다.
"신체는 앎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한다. 그리고 앎을 통한 시도에 의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깨친 자에게는 모든 충동이 신성시된다. 고양된 자의 영혼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니체의 말이 이해가 된다. 앎이 우선이다. 그러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면 앎을 통해 자신이 고양된다.
공자 또한 책을 읽어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말한 사람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 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 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구절이다. 윤정구 교수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서 배운 것이다. 배움의 어원은 생명이 잉태하는 과정과 어둠이 밝혀지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잉태되고 밝혀진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스며드는 과정의 뜻이 담겨 있다. 행복이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을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순한 행복(Eudemonia, Happiness)"이란 배움을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는 상태인 수월성(Excellence)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공자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즉 배우고 익힘에서 오는 체험을 행복의 근원으로 설명했다. 공자는 이런 배움을 위해 친구들이 멀리서도 찾아온다면 행복의 최고상태를 누리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有朋自遠方來 유붕자원방래면 不亦樂乎 불역락호).
학이시습(學而時習),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직립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게 사람 답게 사는 길이다. 평소엔 물질을 따라가느라 칠정이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배우고 익히는 순간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때 느끼는 충만감이 바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런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자연스레 벗이 찾아오게 된다. 방탕과 쾌락에도 무리가 있지만, 그들은 벗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해가 없는 친밀함은 결코 우정이 아니다. 나와 너의 마주침을 통해 또 다른 존재로의 전이가 우정과 지성의 향연이다. 그것은 나를 뒤흔들고 요동 시키는 쾌락이 아니라, 거꾸로 거친 패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평온한 기쁨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이다. 요지는 배우고 익히고, 책을 읽고, 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모두 즐거움과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의 배치를 변경해야 한다.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 가야 한다. 현대 생리학으로 말하면,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 쾌락인데, 그것은 계속 강도를 높여 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갈애(渴愛)에 빠지게 된다. 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해서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 온다. 이익과 권력의 장에서는 벗이 아니라, 라이벌을 만난다. 전투적 경쟁심도 감정의 파토스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곧 벗이다. 우정은 관계의 세로토닌이다.
이 모든 것의 근간은 읽기이다. 읽는 행위가 없는 학습은 없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읽고, 계절을 읽고, 사물을 읽는다. 그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끌려 다니지 않고 소유와 쾌락에 치 달리지 않는 거룩한 기쁨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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