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3.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20일)
오늘은 대한(大寒)이다.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 네 번째 절기로 '큰 추위'라는 뜻이다. 대한은 음력 12월 섣달에 들어 있으며 매듭을 짓는 절후이다. 양력 1월 20일 오늘이 대한이다. 말 그대로 하면 가장 큰 추위인데, 그건 중국 이야기이고, 우리 나라에는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대한이 소한보다 오히려 덜 춥다. 봄은 기어이 온다. 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게 천지의 마음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40장에서 말하는 "반자도지동(反者道지動)"을 나는 믿는다. 되돌아 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 즉 도의 자연스러운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지고, 나의 밥줄인 복합와인문화공방이 망하기 직전이다. 그러나 대신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렇게 기다리면 봄도 오고, 코로나도 물러갈 것이라 믿는다. 사계절의 순환을 따르며 일상의 시간을 지혜롭게 살면 된다.
다행인 것은 평소 고민하던, 읽고 쓰는 문제에 대해 숙고할 많은 시간에 대해서도 감사하다. 몇 일간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이젠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을 지나, 이젠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한 고미숙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공유한다. 고미숙의 학습공동체 <감이당>의 네 개 모토가 정말 마음에 든다. 나의 2021년 지표로 삼을 예정이다. 게으름이 일어날 때 그 4개의 모토를 기억하며 마음을 챙길 생각이다. 도심에서 유목하기/세속에서 출가하기/일상에서 혁명하기/글쓰기로 수련하기.
(1) 도심에서 유목하기: 자본의 한 가운데서 자본에 포기되지 않는 길을 열어 가겠다는 것이다. 유랑은 이제 멈추고 진정한 유목을 할 생각이다. 나는 디지털 유목인(노마드)를 지난 해 많이 고민했다. 지난해 6월 22일과 6월 23일자에 이에 대한 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유목은 유랑과는 다르다. 유랑이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가는 거라면, 그래서 공간은 끊임없이 변이하지만 존재성은 달라지지 않는 거라면, 유목은 기위애서 타자를 만나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세속에서 출가하기: 난 프랑스에서 유하며 배운 것이 세속주의(Laïcisme, secularism, 정교 분리)이다. 작년 4월 6일부터 10일까지 글을 보시면 된다. 출가의 핵심이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속적 삶 속에서도 욕망의 변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3) 일상에서 혁명하기: 지금까지 혁명은 늘 거대담론의 전망 속에서 시도되었고,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물질적 영역은 비약적으로 진화했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낡은 습속으로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상과 습속의 뿌리는 욕망이다. 그것은 제도의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혁명의 시작은 일상이다.
(1), (2) 그리고 (3), 즉 유목, 출가, 혁명은 존재의 변환을 요구한다. 존재의 욕망의 재배치를 위해 존재의 '건너 가기'를 요구하는 키워드들이다. 이건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다른 존재가 되기이다. 그럼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물으면서 나자신을, 세상을 그리고 우주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읽기라고 고미숙은 말한다. 그럼 읽기를 어떻게 훈련하는가? 강철도 수많은 단련을 통해야만 일용할 도구가 되고 빛나는 보석이 되는 거서처럼(마부위침, 磨斧爲針), 사유도 수련을 해야 한다.
안다는 건 그 지평을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 감이 없다면 앎이 아니다. '알지만 됐어!'는 모른다는 뜻이다. 그 무지는 냉소가 되어 사방을 얼어붙게 할 것이다. 냉소주의는 무섭다. 최근의 한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 사회에서 흑인 남성 미국인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60만 명 정도가 감옥에 가 있다. 그리고 90만명은 노숙자? 그리고 일부는 해외 파병 복무 중이라 한다. 그리고 20%가 병으로 죽었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남성이 줄고, 여성이 많다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남자들이 아내를 얻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게 되면 장기적으로 가족을 형성하거나 가족에게 헌신할 동기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보여주는 냉소주의, 즉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나는 무섭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행동을 촉구하기보다 냉담함을 부추긴다. 사회의 불의가 난무하면, (예를 들어 나치정권) 누군가가(자기가 아니라) 그 독재자를 죽여 주기를 바라거나, 나에게나 나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게 냉소주의이다. 특히 정치적 냉소주의는 무섭다. 왜냐하면 정치는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치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정치는 우리들의 '정신 세계'도 지배한다.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일지라도 정치는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지배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목, 출가, 혁명이라는 비전은 일상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건너 가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이전과는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강조한다.
(4) 글쓰기로 수련하기이다. 글쓰기란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사람들은 부와 성공, 성장과 개발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것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전염으로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고, 정부도 생활 속 거리 두기를 강조하며 만나는 일을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 속에서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단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과 삶이 연결되는 지점을 알고 싶어 했다. 지식의 배치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쓰기를 배제한 채 읽기만 한다.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이자 정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글쓰기를 한다면, 겨우 사람들은 일기, 수필, 독후감 정도이다. 글쓰기를 고작 감상적 토로나 자기 위안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글쓰기는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
읽으면 써야 한다. 마치 들으면 말하고 전하는 것처럼. 그런데 왜 사람들은 쓰지 않을까? 고미숙은 "자본의 은밀한 전략"으로 의심한다. 21세기에 와서, 사실 디지털과 함께 자본은 거의 모든 장벽을 다 철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도 상품을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 영화를 만드는 자와 관람하는 자 등으로 구분되어, 인문학 공간에서도 지식을 전파하는 자와 지식을 구경하는 자 사이의 장벽이 견고하다.
인문학은 삶의 지도를 그리는 행위이다. 적당히, 대중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 대한 탐구를 대충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는다. 죽음에 대해 탐구 없이 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갈 길은 없다. 죽음을 탐구하면서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따라서 인문학은 대충대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글쓰기는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써야 한다"고 말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써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면 기혈이 막혀 버린다. 막히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통즉불통(通即不通, 통하면 아프지 않다)이란 말이 있다. 그래 글쓰기는 양생술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삶을 살리는 행위이다. 이를 '양생(養生) 술(術)'이라 한다. <장자> 제3편 양생주 편이 생각 난다. 제3편 양생주는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 생활을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하게 살아가는가를 보야 주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이다.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無待)'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양생養生)',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양생(養生)의 주, 즉 생명을 북돋우는 요체인가 생주(生主)를 양(養)함, 곧 생명의 주인 혹은 생명의 요체를 북돋움인가? 생명을 북돋우면 생명의 주인도 북돋게 되는 것이니 둘 다 맞다.
지금 나는 고미숙의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를 읽으며,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글쓰기로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것도 양생하는 수련을. 그 수련을 위해 첫 번째로 고미숙은 수렴과 집중을 하라고 한다. 이건 카오스에서 차서(次序)를 부여하는 일이라 한다.
실제로 우주는 우아한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아니라,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카오스(chaos, 혼돈, 무질서)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끊임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방향도, 목적도 없다. 변화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태양계의 중심 별인 태양은 지금도 계속 폭발 중이라고 한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으로 현재 50 억 살쯤 된다. 50억 년쯤 뒤에는 완전히 폭발해 은하계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당연히 태양계에 속한 지구 역시 그럴 것이다. 거기다 23,5도 기울어져 갸우뚱한 상태로 자전과 공전을 하느라 바쁘다. 계절은 끊임없이 돌아오지만 단 하루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흐름에 차서(次序)와 리듬을 부여한 것이 역법이다. 차서와 리듬,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이다. 그 역법은 1년, 4계절, 360일, 황도, 24절기, 72 절후 등등이다. 이런 척도가 없다면 어떻게 매일, 매년, 일생이라는 주기가 탄생하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원리이다.
차서와 리듬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리듬이라는 개념은 오래 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삶을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하게 살려는 양생술에 필요한 것이 리듬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리듬을 타세요/박수소리
글쓰기든,
사는 것이든,
리듬이 중요하지.
리듬이 먼저 있고,
난 그 리듬에 실려 간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 갈 때도
리듬만 타면 잘 내려간다.
딴 생각 않고,
리듬만 타면 잘 내려간다.
엘리베이터에 한 발만 내디디면 그냥,
올라가는 것과 같다.
글쓰기에선 산문이 리듬 타면 그게,
시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삶이 리듬 타면,
그건 춤이다.
그래서 춤꾼은 이런 말을 한다.
춤을 출 때 생각하는 것은
댄서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춤을 출 땐,
춤을 느껴야 한다.
리듬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같이 사는 사람과 리듬이 안 맞으면,
친한 사람과 같이 걸어도 리듬이 안 맞으면,
힘들다.
모든 공부는 파도타기처럼
리듬을 배우는 것이다.
우주와 같이, 삶 또한 늘 카오스(혼돈)이다. 엔트로피 법칙이 말해 주듯이, 세상은 늘 무질서를 향해 간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늘 욕망과 능력의 간극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를 세우고 창조하는 것은 힘들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우리의 몸도 그렇다. 들숨과 날숨, 수렴과 발산을 교차하는 것이 우리 몸이지만, 흩어지는 기운이 늘 앞선다. 잘 보면, 발산은 역동적이지만 한순간에 공격적으로 변질된다. 역동과 공격의 차이는 속도에 달려 있다. 천천히 발산하면 역동, 빨리 급하게 발산하면 공격이 된다. 그러니 멈추고 힘을 빼는 훈련을 늘 하고 있어야 한다. 늘 속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멈추고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작년에 우리 사회에 시끄럽던 '버닝썬 게이트(Burning Sun gate)'가 있었다. 르 메르디앙 서울 호텔에 있던 나이트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폭행 및 경찰 유착, 마약, 성범죄, 조세 회피, 불법 촬영 물 공유 혐의 등을 아우르는 대형 범죄 사건을 말한다. 태양만으로 충분한 데, 그걸 불태우고 싶다는 것이다. 그 열기에 휩싸이면 정신줄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벅차다. 그래 다 날라갔다. 방심(放心), 마음이 방학으로 떠난 것이다, 난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구심력을 잃고, 너무 욕망의 원심력을 쫓다 보면, 다 산산조각이 되어 날라간다. <장자> "인간세"에 "좌치(坐馳)"라는 말이 나온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 하고,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은 "좌망(坐忘)"이라 한다. 서로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무위는 좌망에서 나온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수렴(收斂)이란 말은 주로 어떤 현안에 대해 이해관계가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은다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수학 용어로 쓰인다. 여기서 몸과 마을을 단속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여 수승화강(水丞火降)을 이루고, 욕망과 능력이 마주치는 포인트를 찾아야 하고, 뇌의 재잘거림을 멈추게 하는 마음 훈련이 수렴이다. 여기서 수승화강이란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 신장의 물은 올라가고 심장의 불은 내려가야 한다는 양생의 원리를 말한다. 그저 평범한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수렴과 집중은 필수이다.
이런 수렴과 집중을 하는 것으로 고미숙은 "글쓰기로 수련하기"를 강력 추천한다. 그녀는 읽기도 수렴과 집중의 과정이지만, 강도가 좀 약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책을 읽고 있는 데도 생각이 흩어지고 산만해지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 집중적을 읽는다 해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그 많은 언어와 문장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사실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카오스에 차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정신의 사막에 지도를 그리는 행위이다. 거기에 더 임펙트를 부여하려면 써야 한다. 쓰기는 읽기의 연장선이자 반전이다 도약이다. 읽기가 타자의 언어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그 접속에서 창조적 변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접속과 변용은 연결이면서 도약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쓰기는 다른 활동과 능력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읽기보다 수렴과 집중이 더 필요하다. 읽기는 약간의 산만함을 허용하지만, 쓰기는 그런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역간 방심하면, 낱말들이 사방으로 마구 흩어져 문장 하나 단락 하나 구성하기도 힘들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말들을 다시 연결하여 문장을, 단락을 그리고 책을 만들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읽기도 달라진다.
읽기와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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