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8일)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간이 천지,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된 문명 사회는 증식과 분화를 거듭하여 삶과 분리된 지식과 정보로, 지적 재산으로, 마침내 매뉴얼과 스펙으로 추락해 버렸다. 인간은 자연, 다시 말해 생명과 우주로부터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자연을 오직 착취, 이용, 개발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그 자연의 산물인 인간 역시 그렇게 대하게 된다. 자연과의 단절은 인간 사이의 소외로 이어진다. 단절의 대가로 얻은 부의 가열찬 팽창은 어느 순간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지금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을. 거기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일상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분리 속에서 소외 당하고 있다.
오늘날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일부 기득권 세력들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를 몸과 살고 있는 장소와 시(詩)로부터 우리의 삶과 분리시키려 애를 쓴다.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든다.
(1)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과학의 도움을 받아 살지만 정작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직접적 감각 체험으로 부터 멀어진 채 살아간다. 몸을 사용하고, 몸의 감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2) 현대인은 또한 어떤 장소와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부평초처럼 떠돈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공동체적 삶 또한 무너졌다. 마을은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고이는 장소가 아니다.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조차 가족들의 기억의 뿌리가 아니라, 재산 가치로서 기능할 뿐이다.
(3) 물질적 풍요의 환상을 따르는 이들은 산문적인 현실에 충실할 뿐, 시적 세계에서 노닐지 못한다. 예술을 모른다. 그들에게 일상은 성공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기회일 뿐이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 깃든 신적 광휘를 보지 못한다. 시적 사고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낭만적 퇴행으로 치부된다. 현실 저 너머의 세계는 시를 읽어야 볼 수 있다.
이제 어서 우리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중주를 회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그 해결방법으로 책을 권한다. 책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경이(驚異)와 땅의 후덕함, 일상적 삶의 비전에 관한 모든 것이 책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책 속에 별의 떨림, 대지의 울림, 그리고 그 안에 인간의 살림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미숙은 "존재의 GPS"를 찾고 싶다면, 사람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고 싶다면, 책을 읽으라고 강조한다. 삶을 고귀하게 해주는 모든 행위는 책으로 연결된다. 바쁘시면, 적어도 인문운동가 공유하는, 길지만, 차분하게 읽기를 권한다. 분명한 것은, 별을 보지 않고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책이나 좋은 글을 읽지 않고 자신의 삶이 천박하지 않고 고귀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무지가 삶을 충만하게 하는 법은 없다. 그게 책을 읽고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삶의 고귀함과 충만함을 위해. 용기를 내자!
그리고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의 종교(宗敎)는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읽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서로 분리되지 않게 천지인을 잇는 것이 진리이다. 그래 진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잇는 행위 자체가 진리라는 말이다. 왜 동사인가? 진리는 천지인 삼중주의 흐름이고 파동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접속하려면 읽어야 한다. 실제 그 '잇는' 일이 어렵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그 지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일상의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휴일에도 먹고 낮잠 자고, 멍하게 TV를 쳐다보고 또 먹는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금 쪽같이 귀한 시간인 줄 알면서도 따지고 보면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지금도 유수처럼 지나간다. 가고 나서 뒤돌아 보면서 아쉬워하고 후회할 시간임이 분명한데 흘러가는 시간을 뻔히 보면서도 막상, 딱히 할 것이 없다고 한다. 혼자 있는 시간, 남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게 성현(聖賢)의 가르침이다. 그 것은 독서와 명상, 그를 통한 자기 성찰이 아닐까 한다. 좋은 책을 골라 하루에 몇 시간씩 읽고 나면 세월이 흘렀을 때 과거를 덜 후회할 듯하다. 방탕에 빠지지 않고 툇마루에 앉아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며 고전을 읽는 옛 선비의 모습을 그리며 배우려 한다.
우리는 무언 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보통은 그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진짜 안다고 하는 것은 내 방식대로, 수입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생산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가 있다. 안다는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은 아프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았는데 아프다면 그건 우리가 깨달은 것이다. 공지영 작가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인간이 사는 무대에서,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 진다. 자연은 내장되어 있는 그대로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 주에 동네 수목원에서 찍은 겨울나무 사진이 생각났다. 내가 언젠가 쓴 시와 함께 공유한다.
겨울나무/박수소리
여름 나무가
한 여름의 폭염에도 견디며
산소를 뿜어내는 것은 겨울에 알몸으로
눈, 바람을 맞고 견뎠기 때문일 거다.
겨울 나무가
한 여름의 화려했던 추억을 먹고
나목 - 이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시리다 -으로
견디는 건 다가올 여름에 대한 희망 때문일 거다.
원시 공동체를 지배한 아름다운 분업 - 여성은 아이(생명)을 낳고 남성은 가치를 창조한다 - 은 제국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제와 남존여비라는 지독한 지배/예속의 관계로 재편성되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이자 혁명사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의 삶은 거반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의식주가 풍요로워진 대신 생명력은 한 없이 빈곤해 졌고, 전염병을 퇴치한 대신 암, 치매, 우울증 같은 나치병들이 늘어나고 있고, 손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자유와 평등은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뿐 사람들은 여전히 우열과 차별에 시달리며 서로 적대감을 키워 가고 있다.
그렇지만 고미숙은 강조한다. 모든 혁명의 성과에는 '책의 해방'이 있다고. 나도 놀랐다. 정말 그렇다. 교육이 확장되고, 또한 교육의 기회도 그만큼 더 확장되었다. 그건 앎의 해방이다. 그 앎의 원천이 책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가? 모든 권력의 원천은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권력을 해체하고 특권층을 타도한다는 것은 이 '앎'의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나, 어디서나 배움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혁명을 하는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의 궁극적 비전은 앎의 해방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책을 읽는 데서 시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은 누구나, 무엇이든 다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디지털, 즉 ICT는 진짜 혁명이다. 디지털은 책을 시각과 묵독이라는 영역에서 해방시켰다. 나무라는 질료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열었다. 사실 책은 천지를 관찰하고 신의 음성을 듣고 대지와 교감하는 것이었다. 나무가 종이로, 책이 다시 종이 안에 들어가면서 대중화의 길을 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에 갇히곤 했다. 묵독의 대세 속에서 책의 지혜는 소리와 분리되었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경고한 장벽도 드높아졌다.
그러나 디지털은 앞에서 말한 모든 구속과 경계를 허물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책에 접속하는 감각을 다원 화했다. 그리고 책이 종이에서 탈영토화 하는 중이다. 디지털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여성과 남성, 인종과 국경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 등의 경계를 넘나든다. 당연히 지식의 분할 선 또한 여지 없이 무너 뜨렸다. 그러나 문제는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온갖 감각적 쾌락에 빠져 중독의 늪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책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삶으로 다시 떠오를 것인가 선택하는 일이다.
근대 이후 대학은 지식을 수많은 절단선으로 분류하고 나누었다. 물론 경계를 분할하고, 특정 분야를 집요하게 분석하는 지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늘 다른 것들 과의 연결, 접속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융합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분할에만 몰두하면 그 지식은 고립되어 고사해 버린다. 우리 현대인들이 지금 길을 잃은 이유도 비슷하다.
고사되지 않으려면 연결되고 접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은 고립되지 않고 유동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인 앎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유동하는 지성이 앎이다. 유동하지 못하는 앎은 우리들의 삶과 분리된다. 이런 앎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앎을 통해, 우리는 자의식의 늪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의 치명적인 질병 중의 하나가 자의식의 비만이다. 자의식의 비만에 고통 받는 이는 자기만의 방에 갇혀 웅크린 채 공포와 분노의 시선으로 타인을 응시할 뿐이다. 자의식은 자체로 늪이다. 그 늪에 빠져 있으면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계속 연결, 확장하면서 지평을 넓혀야 한다. 성공과 경쟁의 차원에서 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적 차원에서 초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게 자신을 만나는 책 읽기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그게 삶의 즐거움이고 힐링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활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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