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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주역>> 읽기에서 가장 먼저 지적 할 수 있는 것이 위(位)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1일)

<<주역>> 읽기에서 가장 먼저 지적 할 수 있는 것이 위(位)이다. 다시 말하면, ‘자리’ 문제이다. 어떤 효(爻)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6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각각의 효가 위치하고 있는 1(初), 2, 3, 4, 5, 6(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다. 이 여섯 개의 자리는 1, 3, 5는 '양효(陽爻)'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陰爻)'의 자리이다. 우리는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하고,  또한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도 '득위'라 한다.  반면,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를 '실위(失位)'라 한다.  예컨대,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는 경우는 '실위'가 되는 거다.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도 '실위'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글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의 주장을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각 효는 '득위'하여야 좋은 것이다. <<주역>>에서 이 ‘위(位)’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양효'라 하여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陽)'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는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점은 없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 '처지(處地)'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그 운명도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처지'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방점을 찍고 싶다.

'처지'는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고 하는 표현을 하였다. 눈이 이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立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한 타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처지'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는 타자의 관점을 취하는 능력으로, 우리가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 갇히지 않고 상대방의 상태에 나를 투영해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능력,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 있는 거다.  또한 그러한 능력의 정도가 사람의 사회성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능력이 부족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병증이 '자폐(自閉)'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는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때 사이코패스(psychopathy)가 된다. 사이코패스는 반복적인 반사회적 행동과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충동성, 자기중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성격 장애 분류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일까?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 자리가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傷)하는 법이다. 고 신영복 교수는 "70%의 철학"을 말하였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거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30정도의 여유'는 '놀고 먹자'는 것이 아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여백 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30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는가?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일 그 자체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나라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주역>>의 정신에 따르면, ‘70%의 자리’가 '득위(得位)'하는 비결이 아닐까?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에 눌린다.  예컨대, '용적율(容積率)'의 개념에 따라, 지기(地氣)에 눌리지 않으려면 용적율이 50% 미만이 라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파트나 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집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린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듯한 집이 좋다.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동태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논리가 특히 <<주역>>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의 이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存在論)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關係論)이다. <<주역>>의 독법은 이처럼 매우 철저한 관계론적 패러다임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시간 속에 던져진 한 판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의 4계절을 거친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온갖 타자(他者)의 시간들이 겹쳐 있다. 그 시간들은 나의 삶의 카이로스를 형성한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역은 변화이다. 그것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다. 그 시공연속체 속에 나의 좌표를 알아야 한다. 6효는 그 좌표들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괘는 왜 6효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최초 괘를 만든 사람(복희, 伏羲)의 머릿속에는, 우주의 중심에 사람이 있고, 그 위로는 하늘이, 그 아래로는 땅이 있는데 이들 삼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하늘에는 하늘의 뜻(象, 상)이 있고, 땅에는 땅의 '이치'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사람의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하늘의 뜻과 땅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묶어서 이것을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다고 사유했으며, 그것을 두고 이른바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그 '도'에는 ‘마땅하다(宜]), ‘당연하다(當)’, ‘늘 있어야 한다(常)’는 등의 의미를 지녀야 하고, 그 보이지 않는 그것의 작용(作用 : 구실, 역할, 움직임 등)을 나름 탐구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것을 두고 ‘음(陰)’과 ‘양(陽)’이라고 인식했으며, 하늘 사람 땅에도 각각의 그 '음'과 '양'이 머물고,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 '도'가 하늘에서는 '음'과 '양'으로, 땅에서는 '강(剛)'과 '유(柔)'로, 사람에게서는 '인(仁, 사랑)'과 '의(義)'로 나타난다고 사유했다. 이처럼 하늘이 땅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대전제 아래,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관계를 '음'과 '양'으로 표시하여 3(天, 地, 人) × 2(陰, 陽)= 6개의 효로써 하나의 괘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공자가 지었다는 십익 가운데 하나인 계사(繫辭) 상, 하편에 나온다. <들우물>이라는 블로그 주인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연휴 동안에 <<주역>>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보다가, 내 심정을 가장 표현해주는 단어 하나를 만났다. 그게 '회정(晦靜)'이다. 여기서 '회(晦)'는 '그믐 회자'이고, '정(靜)'은 '고요할 정'이다. 이 단어를 얻은 것은 훗날 대동법의 주창자로 유명한 김육(金堉, 1580~1658)의 집 이야기에서 이다. 그는 30대 중반 무렵 정치에 실망한 나머지 경기도 가평에 집을 짓고 은둔해 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점을 쳐서 얻은 결과에 따라 집의 이름을 ‘회정당(晦靜堂)’이라 했다. 점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자면 ‘잘 지킴(守)’이고, 풀어서 말하면 “감추어 살면서(회처·晦處) 조용히 기다린다(정후·靜俟)”이다. 김육은 주역점을 친 것이 아니라, 당시 식자들이 공부하던 고전의 하나인 송나라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에 제시된 전혀 다른 체계의 점을 쳤다.

그런데 당대의 문장가인 그의 친구 계곡 장유가 ‘잘 지킴(守)’과 ‘회정(晦靜)’의 뜻이 <<주역>> <복괘(復卦)>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하며, '회정(晦靜)'의 뜻을 길게 풀어내었다 한다. <복괘>는 5개 음 아래 1개의 양이 겨우 자라나기 시작한 모양새이다. 이 여리고 미미한 생명의 기운을 잘 지키는 방법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서 조용히 기르는 것이다. 속에 깊이 쌓아 둔 밤의 기운이 드러나 낮이 되고, 겨울에 감추었다 봄에 펼쳐내듯이, 감추어 길러진 고요함은 움직임의 기초가 된다. <<주역>>에 “자벌레가 움츠림은 뻗어 나가기 위해서 이며, 용과 뱀이 칩거함은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다”라 하였다.

장유는 김육이 감추어(晦) 조용하게(靜) 살지만, 그러한 가운데 몸을 닦고 기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바보가 되거나 마른 나무 등걸이 되기 십상이라 보았다. 감추어 사는 것은 자신을 기르는 하나의 방법이지 자신을 방기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잘 길러서 은은하게 그 덕이 비쳐 나오고, 조용히 거처해도 그 기상이 남을 감화(感化) 하는 것이 '회정(晦靜)의 도리'라고 장유는 말했다.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움직이게 되고, 숨김이 극에 달하면 드러나게 마련이니, 꾸준히 쌓아온 '회정의 힘'은 마치 천둥과 번개가 순식간에 천지를 진동하고 번쩍이며 밝히듯 어떻게 드러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김육은 스스로 은둔하였지만,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숱하게 유배를 당했던 이들 역시 그 기간이 ‘감추어 살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강진 18년 유배 생활 동안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던 정약용이 스스로 아껴서 묘비명에도 쓴 호가 ‘사암(俟菴)’, 즉 ‘기다림’이라는 것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생각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의 글에서 얻은 것이다. 이것도 "사는 법"을 수 있다.

사는 법 2/홍윤숙

날지 못할 날개는 떼어 버려요
지지 못할 십자가는 벗어 놓아요
오척단신 분수도 모르는 양심에 치어
돌아서는 자리마다 비틀거리는
무거운 짐수레 죄다 비우고
손털고 돌아서는 빌라도로 살아요
상처의 암실엔 침묵의 쇠 채우고
죽지 못할 유서는 쓰지 말아요
한 사발의 목숨을 위해
날마다 일심으로 늙기만 해요
형제여 지금은 다친 발 동여매고
살얼음 건너야 할 겨울 진군
되도록 몸은 작게 숨만 쉬어요
바람 불면 들풀처럼 낮게 누워요
아, 그리고 혼만 깨어 혼만 깨어
이 겨울 도강(渡江)을 해요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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