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0일)
나는 코로나-19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기회에 나를 수련하는 시간을 보낸다. 지난 달에 <<장자>> 읽기를 끝내고, 이번 달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꼼꼼하게 도반들과 함께 읽고 있다. 오늘은 벌써 제4장을 읽을 차례이다. 원문으로 읽고, 각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 없이 말한다. 많은 통찰들이 튀어나온다. 즐거운 사유의 시간이고, 마음 바꾸는 회심의 시간이 된다. 언젠가 <<도덕경>>을 잘 모르고, 카톡으로 보내온 다음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오늘 아침 공유한다.
제목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배우는 인생 9계명"이었다. 화장실에 붙어 있는 그렇고 그런 문구 같지만, 하나 하나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1.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平安)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2. 불신(不信)하는 사람은 불신을 당한다.
3. 가지 않으면 이르지 못하고, 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아무리 가깝게 있어도 내가 팔을 뻗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없다.
4.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5.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
6.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가 있다.
7. 행복을 탐욕스럽게 쫓지 말며, 두려워하지 마라.
8. 적게 가지는 것이 진짜 소유이다. 많이 가지는 것은 혼란이다.
9.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사는 없다.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다. 그리고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원문을 인용하며, 계속 <인문 일기>에서 정리해 볼 생각이다. 우리는 지금 <<도덕경>> 제2장을 이야기하면서, 노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③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도올 김용옥)고 했다. 오강남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제는 척 단어 "유무상생" 이야기를 했다. "유무상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이다. 없음과 있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고,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는 거다. 두 줄로 꼬인 새끼 줄을 이 세계, 아니 우주의 원리라는 거다.
그 다음 문장에서 "장단상교(長短相較)"는 "길고 짧음도 서로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라는 말인데, 다음과 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길다고 하는 것은 짧은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반대로 짧다고 하는 것도 긴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길다', '짧다' 하는 것은 독립적인 단독 개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으로 의존하는 상대 개념이다. 아니면, 길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긴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다. 짧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짧은 것에 비하면 긴 것이 된다. 한 가지 사물이 서로의 비교의 관계에서 길기도 하고, 동시에 짧기도 하다는 뜻이다.
오강남은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한다. 내 손의 손가락이 '길다'고 할 때 그 길다고 하는 것이 내 손가락 자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성질로 보는 것이 보통의 상식적인 관찰인데,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본질론적 사고'로, '본질주의적 세계관'이리고도 할 수 있다. 그 세계관에서 모든 것은 각자이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그 본질 때문에 그것이 된다는 거다. 노자는 이런 세계관과 다른 방향에 서 있다. 내 손가락이 길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로의 비교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길고 짧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 등을 보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비본질적 사고"로, '비본질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초탈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어느 것이나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고 보는 거다.
얼마 남지 않는 대통령 선거로 양 진영이 크게 대립한다. 오늘 아침 나의 <인문 일기>를 보고, 공존(共存)하고 상생(相生)하는 길을 좀 찾았으면 한다. 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을 향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한다. 나부터 금을 긋지 말고, 다 받아들이자고 다짐한다. 우리 시대는 끊임없는 금 긋기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금 밖으로 쫓아낸다.
우리는 금을 긋고, 무지로 서로 배척한다. 그 금 긋기와 몰아내기가 배제의 논리이다. 문제는 몸 안의 병을 수술 가위로 절제하듯이 우리 안의 불순한 것들을 잘라내는 배제는 정의, 도덕, 정통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나는 다름이 틀림과 다르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살아 있는 타자들을 하나로 묶어 포용의 논리로 싸 안고 싶다. 금을 새로 긋고 싶다. 다 포용하는 쪽으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주영헌
저 나무,
죽었는지 알았더니 새순이 돋고 잎사귀가 핀다.
반은 죽었지만, 반은 살았다.
삶과 죽음의 그늘이 함께 자란다.
노인,
낡은 보행기를 끌고 간다.
육십갑자 하고도 한참을 더 감아야 되돌아갈 수 있는 어린 날
보행의 초심을 기억하려는 듯
조심조심 발을 떼고 있다.
굳어 버린 왼쪽 발은
함께 보행하던 오른발의 진심을 되짚으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공존(共存)이란
삶과 죽음이 서로의 등이 되어주는 일
생이 또 다른 생의 배후로
後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지해 주는 일
잘려나간 밑동에서 새 줄기 돋아난다.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다.
생(生)의
특수 상대성 이론.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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