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30일)
오늘도 설 명절 다음 날로 휴일이다. 어제는 가까운 조카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바로 집으로 왔다. 눈이 많이 와 산소에 가서 인사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하잔한 오후에 딸과 동네 맛집을 찾아 다녀온 후 저녁에는 연 이틀 영화를 보며 한가한 시간들을 보냈다. 설 전날은 <원더>라는 영화를 보았고 어제는 외로움과 대안 가족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담은 <바튼 아카데미>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1.
<원더(wonder)>의 '원더'라는 말은 '경이, 놀라움, 경탄'이란 뜻이다. 다음 말 아침 영화를 되새기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경이로움>이란 시를 기억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과 경외로 나를 떨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칸트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우주 속 지구라는 별에 의식 있는 존재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경이는 없다. 우주의 입자가 수 없는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현재 내 몸을 이루고 있다. 수 억도 열로 달구어지다가 차가운 암흑의 공간에서 헤매기도 했다. 어떤 인연이 이 꼴을 만든 것일까?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고,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나일까?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답이 없는 질문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의 끝 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는 누구일까? 잔잔히 흐르던 물길이 돌부리를 만난 것 같다.
2.
경이로움/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 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원더>라는 영화 속의 기억 나는 대사 몇 개를 공유한다.
- "넌 못생기지 않았어, 네게 관심있는 사람은 알게 될 거야." 헬멧 속에 숨었던 아이 ‘어기', 세상 밖으로 나오다! 다들 자신만의 비밀과 아픔이 있다. 그러니 부러워할 것 없고, 내가 아픔 만큼 사람들은 다 하나씩 아픔이 있으니, 만나는 모두에게 편견 없이 친절하게 구는 것밖에는 다른 길은 없다.
- 옮음 이냐 친절함 이냐를 선택해야 할 때, 친절함을 선택해라.
- 어기의 외모는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 네가 외톨이처럼 느껴질 거야. 근데 넌 외톨이가 아냐
-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두에게 친절하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면 돼요.
- 위대함은 강함에 있지 않고 힘을 바르게 쓰는 것에 있다.
- 용기, 친절, 우정, 성격.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하고 때때로 우리를 위대함으로 이끄는 자질입니다.
- 우리 모두 얼굴에 자국이나 흔적이 있단다. 이 자국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지도 같은 거야. 그 흔적은 절대, 절대로 추할 수가 없단다.
3.
고 이어령 교수는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재미나게 살아 오셨다 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기 다움'은 실제로 나만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이어주는 여정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물음은 하나의 기쁨을 낳고, 또 하나의 기쁨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이렇게 순환한다. 이 교수에 의하면,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 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향해 썼고, 자신이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라 했다. 여기서 '타우마제인'이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 '놀라움'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대한 관찰과 숙고와 함께, 우리가 인간의 지성을 통해 무엇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매일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를 쓰게 하는 나의 동력이기도 하다.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난다. 우리는 '타우마제인'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 매일 글을 쓰며 발산하고, 그 발산한 만큼 수렴을 하고 싶게 만들어, 또 책을 읽고,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발산과 수렴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앵거스 플레처에 의하면, 그리스 극작가들은 경이, 즉 '타우마제인'의 더 큰 가능성을 전달하고 어떤 발명품을 고안했는데, 그게 '플롯 반전(plot twist)'이라는 거다. '플롯 반전'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뒤틀리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마지막 고리이다. 그 마지막 고리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방향이 확 꺾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결국 이야기의 흐름이 뒤집어져 우리를 뜻밖의 장소로 인도한다. 이때 우리는 '타우마이젠'을 선물 받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플롯 반전'의 밑바닥에 "확장(stretch)"이라는 문학 발명품이 하나 더 있다. '스트레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단어의 뜻은 '가지개를 켜며 몸을 뻗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정신과 감각도 스트레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어쨌든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 곧 ‘깨달음’이다. 깨져야(깨다) 시작할 수 있었고, 알 수 있다(알음). 그 다음 ‘세상을 바꾸는 것’ 이다.
4.
다음은 "상처를 안고 홀로 견디는 자들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디졸브의 짙은 위로"(이동진)가 담긴 <바튼 아카데미(원제:The Holdovers, 남겨진자들)> 이야기를 한다. 영화 속의 소복이 쌓인 눈과 어제 오늘 내린 눈이 쌓인 우리 동네와 오버랩 되었다. 디졸브는 장면을 커트하지 않고, 앞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게 하는 방식이다. 즉, 한 장면이 페이드아웃(fade-out)되는 동시에 다른 장면이 페이드인(fade-in)되는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전환 방식이다. 그리고 1970년가 배경인 영화가 아니라, 아예 19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 같았다. 1971년 배경이다. 그때면 내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이 영화가 준 메시지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영화 속의 폴 선생은 고지식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집안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학생들은 그렇게 자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낙제점을 아무렇지 않게 주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다. 무엇이 옳은 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적당한 융통성이 필요한 것 같다. 아직 성장하는 학생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당연히 모른다.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정해 놓은 틀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 학생으로 찍힌다. 그런데 영화 끝 부분에서 폴 선생은 오른 쪽 눈을 가리키면서 이쪽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오른쪽(right)는 다른 의미로는 '올바른'이라는 의미이다. 무엇이 올바른 쪽인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 쪽을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상실과 생의 허무 속에서도 많은 독서로 견디는 폴 선생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대부분의 인생은 닭장의 횃대처럼 더럽고 옹색한 거야." 그렇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에 남은 두 명의 인물(메리와 털리) 속에서 상처를 본다. 그러면서 "모두가 널 버려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폴 선생에게서 내 남은 삶의 방향을 보았다. 영화의 마지막에 폴 선생의 '새 출발'이 위로를 주었다. 이사회에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술, <레미 마르땡 루이 13세> 꼬냑을 입에 머금다가 차창 밖으로 탁 뱉는다. 그리고 평소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했던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잘 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학교에서까지 버림받았고, '버튼'이 내 전불 믿으면서 일생을 여기서 가만히 살아왔지만 항상 다른 곳에 끔이 있었던 그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위해 용기를 냈고, 새로운 출발에 받을 딛는다. 이사회에서 준 꼬냑을 뱉는 것은 아마 그동안의 과거를 뱉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폴 선생이 떠난다고 울지도 않고, 오히려 악수를 나누며 먹먹해 한다. 메라는 두꺼운 공책을 주면서, 못다 쓴 논문을 쓰라고 건넨다. "그냥 한글자씩 쓰면 돼요, 뭐가 어려워요"라고 말하면서.
5.
삶은 '건너 가기'이다. '아무도 걸은 적이 없는 길을 계속 건너간다.' 이게 내 철학이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맛은 관계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활동의 폭이 확장될 때 일어난다. 게다가 관계와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가운데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 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와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6.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은 노자 <<도덕경>> 제24장에 나온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하여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일어서는 것으로 부족해 발꿈치를 든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까치발과 큰 걸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시효과를 준다. 처음에 많고 빠른 결과를 가져올 뿐인데 그 과정이 지속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까치발을 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순간에만 통할 뿐 그 다음에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좀 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서는 단단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는 멀리, 오래 갈 수 없다. 모든 부자연스런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런 일로서는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결과만 불러 올 뿐이기 때문이다.
7.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人爲)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며 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단지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8.
<<구약성서>> <시편> 제 1편 1절이 소환된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본다.
▪ 그는 범죄자들과 나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동참하여 걷지(walk) 않는 사람이다.
▪ 그는 죄인들이 가는 길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 그는 남을 중상모략 하는 자리에 있지(sit)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걸 다음 같이 '안 하기'를 하는 거다.
▪ 공동체를 음해 하는 일을 도모 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에 걷는 일(walk), 즉 행동하지 않는다.
▪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는 삶의 스타일을 따라 그 안에 서 있지(stand) 않는다.
▪ 자신이 모르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중상 모략하고 시기하는 자리에 앉아 남을 헐뜯는데 앉아(sit)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서 앉아 있는 다는 건 자신의 몸에 베어,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앉아 안주(安住)하는 사람이다. 탈 영토 화하여, 건너가기를 끊임 없이 시도하여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한다.
▪ 나는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걷고 있는가?
▪ 나는 오늘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함께 서있지 않는가?
▪ 나는 오늘 남의 불행을 즐거워 하는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안 하기'를 위해서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소환된다. '무위'는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런데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라 했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부족하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 점검과 자기 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의 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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