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23일)
오늘의 화두는 '그냥 걸어가자'는 거다. 분열과 갈등의 우리 사회가 악화되며 심각해 진다. 그럴수록 '남 탓'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일일시호일"하는 거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디딤돌을 딛고 그냥 건너가는 게 우리들의 삶이다.
1.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감사는 '희노애락애오욕(七情)'과 차원이 다른 윤리적 정서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이 원석이나 원유라면 윤리적 감정은 원석이 가공된 다이아몬드이거나 휘발유이다. 감사를 생성시키는 원인은 우리 모두는 빚진 자라는 각성이다. 우리는 잘 보면 모두가 빚진 자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났고,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헌신에 빚을 졌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잘난 사람이기 때문에 빚이 없는 듯이 행세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연에게도 큰 빚을 지고 산다.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산소와 공기와 물도 대부분 공짜로 써왔고 아름다운 경치를 통해 상한 마음을 힐링한 것도 자연에 대한 빚이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진 빚이 크다. 지금 이만큼의 성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동료나 선배들이 음양으로 도와주고 응원해준 덕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나가고 세상을 호령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 더 큰 빚을 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세상이 모두 자신 덕택에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감사할 줄 모른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빚진 자라는 사실을 각성하는 일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면 세상은 감사의 세상으로 바뀐다.
2.
나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중용>> 제23장의 다음 구절을 기억한다. "致曲 曲能有誠(치곡 곡능유성) (…) 唯天下至誠(유천하지성)이어 爲能化(위능화)"이다. '숨겨진 진실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 (…)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란 뜻이다. 영화 <역린>으로 유명해진 <<중용>> 제23장은 우리가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지성(至誠)"을 잘 해석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두 단계이다. (1)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그런 식으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정성스럽게 하게 된다. 작은 일에 최선과 그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윤정구 교수는 이 "치곡(致曲)"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 '마음이나 의식의 굴곡진 것을 펴서 다스리는 것'으로 읽는다. '선한 생각을 하는 일'로 본다. 설사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할 수 있는 힘은 본인이 하려는 것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치곡"의 다른 말이 '진성성(authenticity)'이라는 거다. '진정성'의 정의는 'true to oneself'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같은 상태를 의미 하기 때문이다. "곡(曲)"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의식과 마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치곡"이라는 거다.
3.
변화의 완성은 오얏과 복숭아 향기에 취해 많은 사람들이 과수원을 찾아오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다. 오얏(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게 하므로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하면, '복숭아 나무와 오얏(자두)나무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아래 저절로 발자국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일 년 내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말없이 조용하게 정진해 왔던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개가 내리나 서리가 내리나, 그 나무에겐 열매를 훌륭하게 맺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되니, 마침내 탐스런 복숭아와 자두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게 되었다. 한문 '혜(蹊)'를 찾아 보면, 의미가 여럿이다. '좁은 길', '지름길', '발자국' 등이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발자국을 남긴 좁은 길이 지름길이다. 지름길은 멀리 돌지 않고 가깝게 질러 통하는 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요즈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군대에서 보냈던 허송세월을 사는 것 같다. 허(虛)하다. 그러나 복숭아 나무와 자주 나무처럼, 말없이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하며 보내면, 그 길이 지름길일 것이다.
4.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딸과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오래 전부터 알던 영화였는데, 다시 선택했다. 오모리 다쓰시 감독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40만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 에세이 <<매일매일 좋은 날>>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가 40년간 다도를 배우며 알게 된 인생을 담은 에세이다. ‘일본의 국민엄마’인 키키 키린의 마지막 유작이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중국 당송오대(唐宋五代)의 승려인 운문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는 운문종(雲門宗)을 열어 중국과 일본의 임제선(臨濟禪)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말은 매일매일이 즐겁다는 게 아니라 현재 싫은 일 혹은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의미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일일시호일'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는 글자는 비슷하지만 뜻은 조금 차이가 있다. '일신우일신'은 주체적으로 노력해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반면 '일일시호일'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하루의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매 순간 살아가자는 것으로 여겨진다. 격렬한 이념대결로 매일 시끄러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일시호일'은 달관의 경지를 가르치는 듯하다.
5.
‘일신우일신’은 은나라 탕왕의 세숫대야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진실로 새로워지려거든,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세계는 동사로만 존재한다. 새로워지려 하는 것이 세계와 접촉하는 일이다. 생존의 터전인 세계가 계속 새로워진다. 세계가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행하는 운동을 우리는 변화라고 한다.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따라 이념이나 가치관도 바꾸지 않으면 그 이념의 주인도 따라서 도태된다.
6.
인문 정신이란 야성(野性)을 키우는 일이다. 마음 속의 야수(野獸) 한 마리를 키우는 것이다. 짐승처럼 덤비는 일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여는 것이다. 집착을 버린다. 탐이 날수록 "놓아라, 그리고 비워라!"이다. 실제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탐/진/치'이다. 우리는 그것을 '삼독(三毒)'이라고도 한다. '탐욕'과 '진에'와 '우치'의 줄임 말이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다르게 말하면,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이것을 다시 두 개로 줄이면, '아집(我執)'과 '무지(無知)'이다. 아집은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아집과 무지를 버리는 일은 시장 좌판대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길을 헤치는 물고기로 살아 가는 일이다. 야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의 "낙타"처럼,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하루의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매 순간 살아가자는 것이다. "일일시호일".
낙타/김진경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때때로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 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 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 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사막을 사막으로 버리고 떠나는 자.
이제 자네 속의 사막을 거두어 내고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서 게나.
자네가 고개 숙인 낙타의 겸손을 배운다면
비로소 들릴 걸세
여기저기 자네의 곁을 걷고 있는 낙타의 방울소리.
자네가 꿈도 꿀 줄 모른다고 단념한
낙타의 육봉 깊숙이 푸른 벌판으로부터 울려 나와
모래에 뒤섞이는 낙타의 방울소리.
7.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다." 저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짐이 없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울까? 인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마음의 짐이 무거우면 인생 길이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자꾸 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욕망을 가볍게 하는 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 개개인에겐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지나친 욕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오버해서도 안되고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비겁한 방법으로 줄여가도 안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8.
니체가 말하는 아이처럼 살고 싶다. 니체의 '아이 정신'이 소환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문장을 사람들은 '인간 정신 발달의 3 단계'라고 말한다.
▪ 1단계: 낙타의 정신-낙타는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로, 낙타의 정신이란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말한다.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에 대한 고뇌도 하지 않은 채 기존의 사회가 정해준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세상 사람의 삶(자기를 상실하고 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빠져 있는 삶)"이라고 하며, 니체는 "말세인의 삶(밑바닥까지 전락한 인간의 삶)"이라고 했다.
▪ 2단계: 사자의 정신-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 3단계: 아이의 정신-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산다. 삶을 유희(놀이)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는 놀이이어야 한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아이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산다. 삶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2) 매일매일 다가오는 일상의 무게를 느끼지 말고, 경쾌하게 처리한다.
3) 매 순간 자체가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일함(가득차서 넘침)을 즐기며 산다.
9.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행복 철학은 독특하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자유의 개념에서 행복을 도출한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므로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속박이 존재한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마음이 무엇에 속박되어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정념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도 그것의 노예라는 게 에픽테토스의 주장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거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의 존재들을 나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생각, 판단, 욕망, 분노, 혐오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후자는 신체, 죽음, 재산, 운, 인기, 평판, 사회적 지위처럼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는 원인은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이다.”
10.
내 것인 것만 내 것이고, 내 것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만 추구해야 한다. 심지어 운도 내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매달려선 안 된다. 병이나 죽음, 운처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 불행한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범인(凡人)인 우리들이 스토아 철학자처럼 살 순 없겠지만 지혜는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부부나 자녀 간의 관계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자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뜻대로 하려 들지 말고, 나에게 달려 있는 생각이나 분노 등이 내 바깥에서 날뛰지 않게 단단히 고삐를 죄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인의 삶이며, 행복의 비결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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