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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바보의 쓸모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22일)

오늘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제9장 "바보의 쓸모"를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 본다.

이 장은 아흔 아홉 마라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길 잃은 양 한 마리'의 성경 이야기로 시작된다. <마태복음> 18장 12절에서 14절이다.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숫자로 따질 수 없다는 거다. 스승 이어령은 집을 나갔기 때문에, 그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 먹지만,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지 멋대로 놀다가 길 잃은 거다.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다. 그래 탁월한 놈이다.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 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뜨었다. 목동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다. 그 한 마리의 양은 자신 답게 세상에 '존재한' 거다.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다. 목동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동을 바라본 거다.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 거다.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 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길 잃은 양은 그런 존재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루가복음> 제15장 11절에서 32절에 나온다. 우리는 이 것을 '돌아온 탕자 이야기'라 한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 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께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 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큰 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 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좀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와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재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앙드레 지드는 <<탕자, 돌아오다>>라는 단편 소설을 쓴다. 그 소설 속에서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마 못 한 말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서 따먹은 썩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  이 소설 속에서 동생과 형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동생이 말한다. "집 나간 형을 생각하고 그 꿈을 꾸며 살았는데, 형이 돌아오면 나는 어떡하느냐." "형이 말한다. "미안하다. 나는 실패했지만, 너는 떠나라. 나는 실패했지만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낯선 곳에서, 한번도 가보지 모한 곳에서 살아라. 내가 도와주마." 새벽에 떠나는 동생을 혀이 도와 준다. 돌아온 탕자인 형의 마지막 또는 충격적이다. "계단 헛딛지 마라. 쓰러져. 발 밑을 조심해. 쓰러지면 돌아오지 못해."

지드는 이 소설을 쓰고 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한다. 그러나 스승 이어령은 앙드레 지드의 아 바보스러움, 스티브 잡스가 '스테이 플리시'라고 할 때의 그 바보스러움으로 살라고 하신다. 나는 지난 금요일 밤에 동네 친구들과 주님'을 모시고 리듬을 잃었다. 그렇지만, 너무 따지지 않고, 바보처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살 생각이다. 그래서 <인문 일기>를 주일 아침에 쓴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시는 윤재철 시인의 <거꾸로 가자>이다. 이 시를 소개하고 있는 [먼. 산. 바. 라. 기.]의 덧붙임이 내 마음이다. "내 안에도 삐딱이 기질이 있다. 비주류 본능이다. (…)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소리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류의 사고를 외면하고 거꾸로 사는 건 외로움을 친구 삼아야 한다. 반면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족의 행복이 선물로 주어진다. 세속의 즐거움과는 비할 수 없는 오르가슴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아름다웠던 유년의 한 때를 회상시킨다. 시인이 '거꾸로 가자'라고 하는 건,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들린다. 어른이 된 우리는 너무 영악해졌다."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듯하다. 오히려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아니오' 라고 답하라. 계단을 내려가면 올라가라. 1등을 다툴 때 꼴찌에 서라.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라. 잘 나고 똑똑한 사람에 환호할 때, 바보 예찬의 노래를 불러라.

거꾸로 가자/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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