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교수의 <심연>과 함께 '위대한 개인'되기 프로젝트 (9)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소크라테스)
'거룩함'이란 일상에서 탈출해 낯선 오감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연습이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우리는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theoria)',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이 'theoria'로부터 '이론'을 뜻하는 영어 단어 'theory'가 파생했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반복과 인내는 천재의 어머니이다. 관찰이 예술을 만든다. 반복과 인내로 이루어지는 관찰을 '관조'라고 한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대로 '관조'를 말하는 '테오리아(이론)'은 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인내하며 관찰할 때, 슬그머니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기반은 비극 경연에서 출발한다. 비극 경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참여한다. 후원자, 배우 그리고 관객. 후원자는 비극경연을 주관한 도시나 그 도시가 선정한 경제적 후원자이다. 배우는 자신의 영광과 명예 또는 경제적 이윤을 위해 참여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도 공적으로 인정받는 '존경'이 그 사람에 대한 가치의 척도였다. 관객은 연극의 존재 이유 그리고 성공과 실패는 바로 이들의 인정에 달렸다. 관객은 그 어떤 것에도 자유롭다. 그들은 명예나 이윤을 위해 관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연극을 자유롭게 관조한다. 이 관조를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눈앞의 연극에 몰입한다. 몰입도는 우선 후원자와 배우들의 실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들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관객들이 배우의 움직임에 기꺼이 몰입하는 순간, 그들 자신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울고 웃으며 불안과 희열을 표현한다.
배우는 관객과 자신의 몰입을 돕기 위해 어떤 물건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입과 얼굴을 가린다. 이 물건을 '가면'이라고 한다. 이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영어 단어 'person'이 파생했다.
인간은 원래 가면을 쓴 존재이다. 이는 가식적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우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한 배역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했는지를 묻는 존재'라는 뜻이다.
배우는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극중 인물을 표현한다. 배우가 배역에 집중해 무아 상태에 진입하면, 관객들 역시 한 순간 가면 뒤의 배우로 변모한다. 배우의 공포와 연민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객은 무대 위의 배우나 극중 인물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제 3의 눈으로 관조한다. 그러나까 감정이입과 관조, 몰입과 성찰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비극을 통해 함께 공포와 연민을 느끼면서, 동시에 나를 제 3의눈으로 관조하게 된다.
'극장'이라는 뜻의 영어 시어터(theatre)는 '무대에서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 고민하는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리스 시대에 그리스 비극이 상연되던 극장은 인류가 최초로 자기 스스로 제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은 가장 오래된 비극이다. 그러니 기원전 472년이다.
기원전 480년, 당시 페르시아군은 이집트부터 인디아까지 23개국을 점령한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힘을 합친 그리스 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이 전쟁은 문명의 중심이 오리엔트에서 그리스와 유럽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이 연극을 무대에 오르도록 후원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코레고스'라고 했다. 그들은 무대장치 비용과 배우들의 월급 등 연극 제작 및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후원했다. 그 첫번째 코레고스가 페리클레스였다.
페리클레스 [프랑스의 마크롱이 생각난다.]가 23세의 나이에 아테네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가 서양민주주의의 근간을 다진 위대한 정치가이다. 그와 소포클레스는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은 아테네 시민 각자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관조'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 관조를 훈련시키고 싶었다. 이들은 위대한 문명의 기초는 시민들의 관조훈련과 이들의 민주의식에서 발현한다고 믿었다.
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관을 땅에 묻는 소위 '산 일'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이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있다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죽은 사람의 위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비극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에 의해 왜 패했는지 그 이유만을 설명한다. 그 이유는 자만심이었다. 자만심이란 깊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현재 누리는 혜택을 자신이 스스로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마음의 상태이다.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관조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크세르크세스의 눈물을 보고 함께 운다. 자신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원수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민족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 비극때문이다. [나의 슬픔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이의 눈물을 닦어주려 하기보다는 같이 아파하며 함께 울어주는 이의 마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승리의 인간이다.]
자만심을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옳다고 착각해서 행동하는 성급함이기도 하다.
아이스킬로스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 모두가 페르시아 제국을 이겼다는 자만심에 빠지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관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심지어 적까지 포용할 수 있는 연민을 가슴깊이 지닌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같다.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다 연기법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너와 나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 함께 이룬 것이므로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만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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