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18일)
<<인간 다움>>이란 책의 저자 김기현 교수에 의하면, 인간 다움은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의 어떤 품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음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식재료가 적절히 결합해 어우러져야 하듯, 인간 다움이라는 성품도 몇 가지 재료들이 적절히 배결합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점이 나에게 매우 흥미를 주었다.
사용되는 재료가 '공감', '이성' 그리고 자유(자율)'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기준이라는 거다. 이 세가지는 인류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시점에서 성장했다고 본다. 공감은 문명이 시작되기 전, 반면 이성과 자율은 상대적으로 어린 자산으로 본다.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서의 이성은 기원전 7-8세기 경에,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능력으로 서의 자율은 그보다 훨씬 뒤인 14세기 무렵이 되어서야 싹을 틔운다고 했다.
타인을 나와 동등한 존엄성을 갖춘 인간으로 대할 때 사람 다울 수 있다는 생각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순탄치 않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공감, 이성 그리고 자유가 함께 어우러져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다움에 대한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탄생을 기다려야 했다.
- 공감은 느낌을 동반하는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감정은 인류 문명 초기부터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았다. 감정은 인간을 타락의 영역으로 이끄는 것이어서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여러 문명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그릭 느낌은 사적인 영역이고 이를 추구하는 것은 공적인 대의명분능 저버리게 만든다는 생각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감정의 영역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인류사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 그러다가 권위주의 세계의 붕괴와 개인의 탄생으로 인간 다움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무대에 올리게 된다.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이성은 다음 두 가지 논리를 펼치게 한다. 하나는 기존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를 우리는 '합리화'라고 부른다. 이치에 합당한 듯이 꾸며내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거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생각이 지닌 결함을 깨닫고 새로운 생각을 추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성이 기존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해 비판하는 성찰적 역할을 한다.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모순은 없는지, 설득력은 있는지 등을 묻는다.. 이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하면 다른 대안을 찾는 것도 이성의 역할이다. 이를 우리는 '혁신'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관이 공고하고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성은 합리화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다가, 힘이 약화되면 성찰을 통해 더 나은 보편적 세계관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거다.
- 자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하며 전체적인 사회가 돌아가기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를 떠나 개인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개척하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김기현 교수는 인간 다움에 대한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였다.
- 고대(그리스 로마)의 인간 다움: 운명에 이끌리는 삶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 중세: 내명 세계라는 집을 짓는 기나긴 여정을 거쳐, 평등과 내면 세계의 확장으로 존엄한 인간을 위한 전환기였다.
- 근대에 와서, 개인이 탄생하고,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 현대에 와서 다시 인간의 존엄이 도전 받고, 이서이 부정당하면서, 포화 속에서 인간이 위기를 맞았다.
- 미래에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김 교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그러면서 다음 문장을 책 머리에서 말하였다. "인간 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삶의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 삶의 행동 양식이 달라지면 미래의 모양이 달라질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만물의 지배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불의 사용, 도구의 사용, 지능, 손가락의 형태, 직립보행 언어 사용 등이 메뉴에 오르지만, 인간을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한 것은 협동 능력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협동 능력을 말하는 거다. 협동 능력에서 뒤처진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나 인간이 허락해준 특별한 공간을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거다. 지배자가 되는 과정에 협력이라는 요소가 엔진으로 작동했고, 지능, 언어, 신체 구조 등이 인류의 협동을 다른 종들의 협동에 비해 우월하게 만드는 윤활제로 작동했다고 본다. 협력이라는 메커니즘이 방향을 잡고, 그 물줄기에 지능과 언어가 가세함으로써 지배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후 인류가 대규모의 군집생활을 하도록 만든 핵심 원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물물교환이 엔진으로 작동했고, 농업혁명이 윤활유가 되었다고 본다. 가족에서 시작하여 협력의 단위는 점차 커졌고, 정착 생활을 통하여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의 집단들은 서로 간에 경쟁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갈등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부의 결속을 공공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고,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칭송하는 이데올로기가 꾸준히 만들어진다.
신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 사회는 생물학적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가정 한가운데 설치된 화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화적의 불은 조상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지상에서 위로 향하는 불길이 저 높은 곳 어딘 가에 있는 조상과 연결시켜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부장 사회였다. 가장이 화덕의 불을 유지하는 책임을 지고 화덕의 불을 통해 조상과 만나는 의례의 주관자가 된다. 그러다가 공존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씨족과 부족을 거쳐 도시 국가 형태로 발전한다. 그러면서 조상의 위치에 신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들 고대 도시에서는 도시의 중앙에 신전의 성화를 설치해 가정의 화덕을 대체한다. 신전의 성화는 '공공의 화적'이라 불리며 국가 공동 신의 이름 알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사회에서 국가는 확장된 가정이며 조상의 위치에 신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고대 도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는 애국심이었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도시 국가에 각 구성원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국가의 보존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특정한 신의 이름 아래 도시 국가에 속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였다. 어쨌든 신화의 세계관에 완전한 개인은 없었다. 신화, 즉 신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은 역사의 조연으로 자리했다. 다시 말하면, 운명론과 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인간은 조연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기원전 7-8세기 무렵에 철학이 출현하면서, 인간도 삶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시작된다. 인간의 삶이 신의 손에 놓여 있다는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변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 인간을 수동적 위치에서 개척자의 위치로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 '이성'이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이다. 이 말은 어원상 신들의 이야기인 미토스(mythos)와 대비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의미하게 된다. 기원전 6세기경 헤라클리토스가 로고스를 철학적 주제로 등장시켰다 한다. 그는 로고스를 세계의 보편적 원리이자 인간의 지적 능력을 지배하는 원리로 이해했다는 거다. 우리가 말하는 '도(道)'와 매우 유사한 용도라고 할 수 있다는 거다. 그후 로고스라는 말은 때론 보편적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성찰하며 따지는 논증을, 때론 인간의 언어를 의미하기도 하며 점차 그 쓰임새를 넓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로고스는 '이성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어떤 믿음에 대해 또는 어떤 행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유와 원리에 의해 그 믿음과 행위를 정당화할 것을 요청하고, 그에 답하는 능력으로 발전되었다는 거다.
로고스의 등장은 지적인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자연계의 실제 모습과 관련된 진리를 파악하는 인식 능력, 다른 하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삶을 운영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규범을 알려주는 능력이다. 이성의 출현은 일반적 원리에 이해 현상과 행위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지적인 측면이 성장한 것 이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갖는다.
-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 동시에 자신의 능력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 신화에서 신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에서 벗어났다.
- 이성을 통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 관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반칠환 시인이 소개하는 시는 늘 좋아한다. 오늘 아침 시도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덧붙임도 또 한 편의 시이다. "남이 씌워준 모자는 감투다. 모자는 높아서 우러러 본다. 높은 만큼 무겁다.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모자가 자신인 줄 알기 쉽다. 책임지지 않고 군림한다. 어떤 이에게는 감투 대신 신발을 신겨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자는 스스로 쓴 모자다. 제 마음 높은 곳에 썼으니 아무도 우러르지 않는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스스로 쓴 모자는 무겁게 누르지 않고 날개처럼 띄워준다. 자신만의 모자를 쓴 사람은 자유롭다."
모자/신현정
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 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쓰고 하리라.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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