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7일)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제6장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을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본다. 이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가 흥미롭다. 내 앞에 있는 컵은 컵이고 나다. 서로 타자이다.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기면, 관계가 시작된다. 잡으라는 손잡이 때문이다. 손을 내미는 거다. 그러면 손잡이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다. 그러니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아니면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이건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는 거다.
스승은 '타자성 철학' 이야기를 한다. 나는 10년 전에 엄청 어려운 프랑스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존재 저 너머>를 충북대 김연숙 교수와 번역해 책을 낸 적이 있다. 그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고 했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나'는 것이다.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 했다. 특히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할 뿐이다.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 뿐이다.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얇은 막 때문이다.
스승은 작가나 예술가란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 시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거울로 비춰주는 사람이다. 우리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한다.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나 작가만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그들은 자기 삶이 소소하면 사소한 대로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인간들이다. 그때, 스승은 작가나 예술가란 정확성보다는 솔직성이 우선이라 했다. 솔직해야 정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나 작가는 그동안 사회가 덮어왔던 것들을 까발려야 한다고 했다. 덮개를 하나하나 들추는 작업을 하는 거다.
스승은 사람들 잔뜩 있는 곳에서 군중의 한사람으로 끼어 있는 게 싫었다고 한다. 스승이 읽어준 보들레르의 기도가 가슴에 빗금을 긋는다. "주여 내가 저들과 똑같은 숫자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쓰게 하소서!" 우리는 안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떼'로 사는 거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다. 그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면 언어를 자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다. 그게 바로 only one이다. '그 놈이 그 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다. 그런 다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나? '나 없는 우리'는 없다.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는 거다.
나는 카톡으로 배연국 위원의 글이 올라오면 꼭 읽는다. 최근에 만난 글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가 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인간관계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人間)에서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댄 형상이다. 서로 의지하면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을 가리키는 人에 굳이 ‘사이 간(間)’을 보탠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무리 등을 맞댄 사이라도 둘로 존재하려면 필연적으로 ‘사이’라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일은 상자에 다닥다닥 담아서 보관하면 드문드문 담을 때보다 빨리 썩는다고 한다. 과일이 숨을 쉬려면 ‘사이’의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다른 나무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햇빛과 영양분을 받지 못해 잘 자랄 수 없다. 사람 역시 그렇다." 그 사이를 맺어주는 관계이다. 그래 오늘은 심언주 시인의 <관계.를 오늘 시로 공유한다. 사진은 이른 시간에 병원에 가다가 차 문을 열고 찍은 사진이다. 나무들도 서로의 '사이'를 지키고 있다.
관계/심언주
비둘기 그림자는, 비둘기 곁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연신 쪼아 댄다. 비둘기 그림자는 제법 곁눈질이 늘어 비둘기보다 큰 부리로 비둘기보다 더 깊어 바닥의 침묵을 흠집 낸다. 기회를 보아 비둘기를 생포할 자세다. 그러나 비둘기가 날아오르면 제 아무리 큰 보폭으로 쫓아가도 얼마 못 가 비둘기의 속도를 놓쳐버린다.
꽃그림자가 그렇다. 꽃 그림자는 홀로 취해 제 향기를 날린 적이 여러 번 있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심언주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관계 #타자성 #이어령의_마지막_수업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모든 생명의 첫 행동은 밥을 먹는 것이며, 모든 생명의 마지막 행동은 밥술을 놓는 것이다. (0) | 2025.01.18 |
|---|---|
| 바다는 다 받아주어 바다이다. (0) | 2025.01.18 |
| 언어를 문자에 담으면서, 우리는 불멸을 얻었다. (0) | 2025.01.17 |
| 기능에 빠진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본질을 지키는 삶을 살 것인가. (0) | 2025.01.17 |
| 깨달음은 사실 판단이며, 자비(慈悲)는 가치 판단이다. (0) | 2025.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