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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대학>>이 말하는 도 (2)

'참나'를 찾는 여행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선정해야 할 한 가지 주제로 좋은 것이 자신의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거나 기도문, 주문 혹은 화두 등 한 가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함을 통하여 잡념을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

고요한 마음이 지혜로 드러나야 한다. 물이 말고 고요하면 산도 비치는 법과 같다. 그래야 명명(明明, 선천적으로 밝은 것을 다시 밝혀냄)이 된다. 지혜란 태양이 뜨면 만물을 훤히 비추는 것과 같다.

다음은 불가에서 말하는 정려법이다.
인간 자신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광명한 본정신(元神, 생각과 감정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을 후천적으로 다시 되 밝혀서 회복하는 것(明明), 즉 도의 실제적 공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식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이 본래의 광명함을 되찾아 하나의 티끌도 없이 광명해져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번잡한 것은 ‘광명함’이 없기 때문이다.”(송대 철학자 장횡거)

2. 본성이 밝아지면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이루어진다.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니라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워진다.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明德은 本이 되고, 新民을 末이 되며, 知止는 始가 되고, 能得은 終이 되니, 本과 始는 먼저 해야 할 것이고, 末과 終은 뒤에 해야 할 것인데, 이것을 알면 곧 道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박재희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민생이 근본이고, 당쟁은 말단이다. 교육은 인성교육이 우선이고, 지식은 그 다음이다. 가정은 화합이 처음이고 부귀는 나중이다. 인생도 행복이 우선이고 출세는 나중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면, 도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밝은 정신의 광명을 후천적으로 다시 밝히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후, 본말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知’라고 한다.

그러니까 ‘근본과 말단, 시작과 끝‘을 정확히 파악해 내는 것이 ’격물格物‘이며(物有本末, 事有始終),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知)이 ’치지(治知)‘임을 알 수 있다.

‘격물치지’는 8조목이지만, 도를 닦아서 ‘직관력(本然知)’을 키워 가면 우선적으로 ‘사물을 제대로 알게 된다(格物致知)’는 것이다. 정신공부에서는 무엇보다도 ‘아는 것’이 핵심이다. 몰라서 죄를 짓는다. 그러니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 無知’이다.

그럼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나?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혜란 무엇보다 “앞에 할 것(선)과 뒤에 할 것(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를 알아야, ’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면, 또 다른 ’나‘인 ’남‘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다 고유의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두 다 인간적 아픔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타고난 지혜와 능력’, 즉 ‘양지 良知와 양능 良能’이 있다.

양지=사단 四端(바를 단)의 도덕적 마음 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다.
양능=사단의 나머지 마음으로, 상대방을 측은해 하고(惻隱(가엾고 불쌍함)之心), 겸손하고(辭讓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다. 이게 하느님에게 받은 ‘良心양심’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함)의 마음’이다. 유가에서는 이를 도심(道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 자신을 주로 챙기는 일반적인 ‘의식’은 ‘인심(人心, 사람의 마음)’이라고 구분한다. 인심은 온갖 번뇌와 망상에 휩싸여 욕망에 끌려 다니기 쉽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도심(道心),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잘 따르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 인심은 ‘소아적(私)’이나, 도의 마음인 도심은 항상 공정하고 대아적(公)이다. 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바로 통한다. 그러니 늘 깨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깨어있음으로 타인의 아픔과 기쁨을 “마치 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한다. 이러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남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하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그 사람을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타인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와 공감하고 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먼저 내가 정확히 파악 가능한 나 자신을 속속들이 아라야 한다. 즉 내 마음을 우선 점검해야 한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양지(지혜)와 양능(남을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 본래의 광명한 마음이 후천적으로 물욕(物慾)에 어두워져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지(無知)하게 되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나는 항상 '무지'가 먼저인가, 아니면 '아집'이 먼저인가? 두 개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민했다.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면, 내 안의 본래의 광명한 마음을 모르는 것이 무지이고, 그러면 나만 생각하는 아집이라고 본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무지하니까 아집에 사로잡히고, 아집에 사로잡히니 무지한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남을 헤아리고(역지사지) 사랑하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길, 헤아릴 혈, 모서리 구), 즉 역지사지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지 無知’의 때를 벗겨내 ‘지혜’가 드러나도록 하고, 남과 공감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아집 我執’의 때를 씻어내 ‘사랑’이 드러나도록 한다.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선정해야 할 한 가지 주제로 좋은 것이 자신의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거나 기도문, 주문 혹은 화두 등 한 가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함을 통하여 잡념을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

고요한 마음이 지혜로 드러나야 한다. 물이 말고 고요하면 산도 비치는 법과 같다. 그래야 명명(明明, 선천적으로 밝은 것을 다시 밝혀냄)이 된다. 지혜란 태양이 뜨면 만물을 훤히 비추는 것과 같다.

다음은 불가에서 말하는 정려법이다.
인간 자신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광명한 본정신(元神, 생각과 감정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을 후천적으로 다시 되 밝혀서 회복하는 것(明明), 즉 도의 실제적 공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식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이 본래의 광명함을 되찾아 하나의 티끌도 없이 광명해져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번잡한 것은 ‘광명함’이 없기 때문이다.”(송대 철학자 장횡거)


2. 본성이 밝아지면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이루어진다.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니라(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워진다.

다시 말하면,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明德은 本이 되고, 新民을 末이 되며, 知止는 始가 되고, 能得은 終이 되니, 本과 始는 먼저 해야 할 것이고, 末과 終은 뒤에 해야 할 것인데, 이것을 알면 곧 道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박재희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민생이 근본이고, 당쟁은 말단이다. 교육은 인성교육이 우선이고, 지식은 그 다음이다. 가정은 화합이 처음이고 부귀는 나중이다. 인생도 행복이 우선이고 출세는 나중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면, 도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밝은 정신의 광명을 후천적으로 다시 밝히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후, 본말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知’라고 한다.

그러니까 ‘근본과 말단, 시작과 끝‘을 정확히 파악해 내는 것이 ’격물格物‘이며(物有本末, 事有始終),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知)이 ’치지(治知)‘임을 알 수 있다.

‘격물치지’는 8조목이지만, 도를 닦아서 ‘직관력(本然知)’을 키워 가면 우선적으로 ‘사물을 제대로 알게 된다(格物致知)’는 것이다. 정신공부에서는 무엇보다도 ‘아는 것’이 핵심이다. 몰라서 죄를 짓는다. 그러니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 無知’이다.

그럼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나?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혜란 무엇보다 “앞에 할 것(선)과 뒤에 할 것(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를 알아야, ’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면, 또 다른 ’나‘인 ’남‘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다 고유의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두 다 인간적 아픔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타고난 지혜와 능력’, 즉 ‘양지 良知와 양능 良能’이 있다.

양지=사단 四端(바를 단)의 도덕적 마음 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다.
양능=사단의 나머지 마음으로, 상대방을 측은해 하고(惻隱(가엾고 불쌍함)之心), 겸손하고(辭讓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다. 이게 하느님에게 받은 ‘良心양심’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함)의 마음’이다. 유가에서는 이를 도심(道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 자신을 주로 챙기는 일반적인 ‘의식’은 ‘인심(人心, 사람의 마음)’이라고 구분한다. 인심은 온갖 번뇌와 망상에 휩싸여 욕망에 끌려 다니기 쉽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도심(道心),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잘 따르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 인심은 ‘소아적(私)’이나, 도의 마음인 도심은 항상 공정하고 대아적(公)이다. 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바로 통한다. 그러니 늘 깨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깨어있음으로 타인의 아픔과 기쁨을 “마치 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한다. 이러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남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하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그 사람을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타인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와 공감하고 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먼저 내가 정확히 파악 가능한 나 자신을 속속들이 아라야 한다. 즉 내 마음을 우선 점검해야 한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양지(지혜)와 양능(남을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 본래의 광명한 마음이 후천적으로 물욕(物慾)에 어두워져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지(無知)하게 되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나는 항상 '무지'가 먼저인가, 아니면 '아집'이 먼저인가? 두 개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민했다.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면, 내 안의 본래의 광명한 마음을 모르는 것이 무지이고, 그러면 나만 생각하는 아집이라고 본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무지하니까 아집에 사로잡히고, 아집에 사로잡히니 무지한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남을 헤아리고(역지사지) 사랑하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길, 헤아릴 혈, 모서리 구), 즉 역지사지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지 無知’의 때를 벗겨내 ‘지혜’가 드러나도록 하고, 남과 공감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아집 我執’의 때를 씻어내 ‘사랑’이 드러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