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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박수소리 시대정신 2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그 뒤에는 ‘그중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기꺼이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습을 통해 바꿔라(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는 말이 이어진다. ( <논어>, "술이(述而)편")

왜 ‘삼(三)’일까? 동야에서 숫자 '삼(‘三)’은 철학적 의미가 깊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그리고 숫자 '삼'은 하늘·땅·사람의 도를 뜻한다(三, 天地人之道也)’고 말한다.

반면 ‘삼’은 막연히 ‘많다’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여러 번 생각한 뒤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의 ‘삼사이행(三思而行)’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세 명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남이 이를 믿게 된다는 뜻이다.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똑같이 하면 믿게 된다는 의미로 한비자 "내저설(內儲說)편"이 출처다. 춘추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 때 일이다. 위나라는 조(趙)나라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며 수행원으로 충신 방총(龐<8471>)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방총은 조정을 비운 뒤 분명 누군가 자신을 음해할 것으로 예상했다. 떠나기 직전에 왕을 만나 “한 명이 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도, 두 명이 외쳐도, 세 명이 말해도 믿지 말라”고 했다. ‘무릇 시장에는 호랑이가 있을 리 없으니, 여러 사람이 호랑이가 있다(三人言而成虎)고 말해도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당부였다. 왕은 “그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간신들의 거듭된 음해 공작에 넘어간 왕은 조나라에서 돌아온 방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오늘 저녁은 이제까지 몰랐고, 궁금했던 한 가지를 알게된 기쁨에 식사 시간을 잃을 정도 였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로는 성경 속의 예수 제자 중 유다는 유대인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동료를 배신하고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감행하는 인종의 상징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인들이 유대를 점령한 후 100년이 지난 기원 후 66년부터 73년까지 로마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그 때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의 반란을 강력하게 진압했고, 기원전 522년경부터 페르시아제국의 도움으로 재건된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예수 공동체 사람들은 유대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로마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와 구분된 '로마의 종교'의 하나로 포장하고, 유대인들의 경전과 다른 신의 새로운 약속이자 증언인 신약성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한 경전을 더 이상  <토라>로 부르지 않고 '오래된 약속', '구약성서'로 불렀다.

그리스도교는 2세기에 이미 유다를 유대교와 일치시켜 반유대주의와 반셈족주의를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통치 이념을 제공하는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는 "유다는 돈을 좋아하여 예수를 배신하였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수전노라는 잘못된 전통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한 반유대주의, 즉 반셈족주의는 20세기 들어와 인류 최대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그리스도 감성을 지닌 유럽인들에게 유다의 이미지는 나치가 유대인 인종 청소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한다.

반유다 감정은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확립과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다.

우리는 지배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다. 그래 죽을 때까지 배워야 '죄'를 짓지 않는다. 무지가 만들어 내는 '죄'.

20세기 이후 그리스도교는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교리에 그리스도인들을 구속시킨다.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종교적으로 개방되어 삶에 깊은 성찰과 용기 있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이 배제된 종교는 사이비이다.

유다에 대한 재평가는 곧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억압해온 집단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인, 식민지인 등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