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페이스북>은 '학교'이다. 세상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몇몇 분의 담벼락은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거울이다. 오랜만에 윤정구 교수의 담벼락을 방문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은 자신이 세워 자신을 가둔 감옥이다." 주변에 있는 여러 친구들을 보면 이념의 감옥에서 감옥살이를 자초하고 있다. 갇힌 사람이 자신임을 알지 못해 철창 밖 사람들이 갇혔다고 믿는다. 경계병을 자청해 남들을 비난하고 자신을 변론한다. 그러면서 개거품을 문다. 탈주(脫走), 건너가기를 막는 일에 스스로가 앞장 선다.
불교 용어인 근기(根機)라는 개념을 나는 좋아한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 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나는 '병자'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불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 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안아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어제 그런 사람, '거사'를 만났다. 그의 별명은 '하/하/하'라고 했다. 얼굴이 웃는 얼굴로 얼굴 근육이 재배치되어 있었다. 24시간을 힘 없고 아프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신다고 했다. 그 어머니의 모습도 깊게 내 가슴에 박혔다. 어린이 모습이었다. "하/하/하'의 첫 번째 '하'는 하늘의 '하'자라 했다. 하늘의 소리를, 하늘의 냄새를, 하늘의 길을 믿고 따르며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하'는 웃은 거라 헸다. 어머니가 나를 키우는 스승이라 생각하고, 그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니 어찌 감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웃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일에 감사하면, 웃음은 저절로 나온다. 마지막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는 하나라는 의미의 '하'라 했다. 초상권이 문제인 줄 알지만, 그 두 분의 모습을 몰래 사진 찍었다. 용서를 빈다.
그분들은, 임제 선사가 말씀 하신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대로 살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근기(根氣)는 '근본이 되는 힘'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무슨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기 싫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스스로 그 상황의 주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런 일은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얽매이지 않아 주체적이고 자유 자재함'으로 설명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길이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일을 대하고 처리해 나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이다.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 해야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수처작주'의 마음을 가지려면, 비교 분별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비우고, 그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니, 집착을 버리고 유연해지는 것이 '수처작주'의 시작이다. 마음을 비우고(분별심과 집착), 삶을 놀이로 만들면, 자유롭고, 즐겁고 행복해진다. 그때부터 '수처작주'의 삶이 시작된다.
단비가 단 것은 잠시 스쳐 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오래 잡고 있으면 괴로움이다. 지금 길이 없다면 고요히 앉아 자신을 보라. 모든 길은 자신을 통한다. 그 길이 '수처작주'의 삶이다. 시적으로 표현하면, "바람에게 길을 물으니 네 멋대로 가"(허허당 스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자기 삶에 확신을 잦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기에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내면의 복잡성에 얽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있는 그 곳이 진리의 세계'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거다. 주인이 되지 못할 자리에는 안 가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가기 싫은 데는 안 가는 거다. 네 멋대로 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구제해주길, 위로해주길, 이끌어주길 바라지 마라. 그대는 이미 스스로 일어날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허허당) 그러니 '수처작주'를 실천하면, 우리는 모두 삶의 주인공이 되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오늘 아침 사진의 오리도 그렇다. '개소리'는 '직업' 정치인들이 하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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