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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참나'를 찾는 여행

<<대학>>의 제 2 코스


1. 3강령

<대학>에서는 道, 즉 형이상학적인 明明(밝은 본래의 본성을 되 밝히는 것)과 德, 즉 형이하학적인 신(새로울 신, 항상 옛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 그리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중간적 존재로서의 인간(民)이 나아가야 할 길인 지어지선(止於至善, 자신의 자리에서 도덕, 양 방면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3강령으로써 책의 서두에 제시한다.

<대학>의 3강령은 道와 德, 그리고 民이다.

"대학의 도는 본래 밝은 본성을 다시 밝히는 데 있고, 덕은 날로 새롭게 하는 데 있고, 사람(民)은 최고의 선(至善)에 머물러야 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하며 德은 在新하며 民은 在止於至善이니라.

도란 '길'이다. 땅(地)에는 땅의 길이 있고, 하늘(天)엔 하늘의 길이 있다. 인간에게도 인간이 걷고 따라야 할 길이 있다. 이러한 길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유형의 길’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길’이 있다. 이 ‘무형의 길’은 우리가 현상계에서 걸어야 하는 수많은 ‘유형의 길’들의 근원이 되는 ‘우주의 길’이다.

무형의 길로서 ‘도’의 문자 풀이는 “머리(首)를 밝혀 가는 중에 알게 되는 것”이다.

‘도’는 본래부터 광명한 선천적 본성(순수의식, 선가(仙家)의 원신 元神, 고차원적인 자아)을 다시 밝혀 나가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통해서, 우리는 이 ‘무형의 길’을 알 수 있는 말이다.

도재명명 道在明明(도는 본래 밝았던 우리 본성을 다시 밝히는 데 있다.): 우리는 다시 밝아진 순수의식의 직관력을 통해서 일체 사물의 근원적 실상(인간의 본성(性)), 사물의 본질(理)이 되는 ‘무형의 길’을 자연히 꿰뚫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혜가 우리에게 본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욕에 가려져서 본래의 광명함을 잃고 사물의 이치에 어둡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사물의 본질을 인정한다. 사물의 불변의 원형, 본질을 ‘이데아Idea’라 한다.

“인간의 본래의 마음은 태양의 광명함과 같다.” (<천부경>)  <천부경>은 인간의 뇌에 이미 ‘하느님’께서 강림하여 계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성을, 아니 영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을 되밝힘 하면 되는 것이다. 광명함을 가리는 ‘때’를 벗겨야 한다. 정신도 목욕을 시켜야 한다. 우리의 몸처럼.

덕(德)의 글자 풀이를 하면, ‘정직한 마음(直)을 가지고 실천(行)하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덕이란 없는 것이다. ‘덕’의 중요한 덕목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이 덕목은 실천한 뒤에 성립한다. 예컨대, 실제로 사람을 사랑한 뒤에야 ‘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덕에 있어서는 우리가 먼저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덕’을 획득하게 된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님,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 하셨다. 이러한 실천은 꾸준해야 하며, 습관화해야 한다. 그래서 덕은 ‘좋은 습관’이기도 하다.

문제는 덕이 적용되는 이 세계가 항상 ‘변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이 서로 상생상극(相生相剋)하며, 서로를 죽이고 살리며 온갖 변화를 일으킨다. 이 현상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하면, “모든 것이 항상 새롭다는 것(新)”이다. 부처님은 ‘제행무상 諸行無常'이라 하셨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모든 것은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덕이란 불변의 도를 기준으로 하여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적응시키는 것이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제반 상황에 ‘그때그때’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변화’하는 현상계를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변증법에서는 만물의 변화하는 과정을 정-반-합의 3단계 과정으로 살펴본다. <주역>에서도 모든 사물에는 항상 음양의 대립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한 대립관계에서 서로 살리는 상생의 결론이 나기도 하고, 서로 투쟁하는 상극의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변화로 해석한다. 이러한 세계를 <대학>에서는 “날로 새롭다(日新, 일신)”고 말한다. 정확하게 이것을 ‘덕재신 德在新’, 즉 “덕은 날로 새롭게 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주역>에서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덕이라 이른다.“고 했다.

덕이란 “불변의 도를 변화하는 세상에 알맞게 적용시킨 것”으로 “도의 구체적 실천"이다. 도는 항상 불변하고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덕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실천할 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그림처럼 도와 덕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해가야 한다.

인간은 진리의 날줄이 되는 불변의 도와 진리의 씨줄이 되는 만변의 덕, 양 방면에서 최선을 다하게 되면 ‘도덕합일(道德合一)’의 ‘중용’이 이루어져 항상 ‘최고의 선(至善)’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말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民)은 최고의 선(止善)에 머물러야 한다.”(민재지어지선, 民在止於至善)

<대학>의 3 강령에서 말하는 도, 덕, 민은 천, 지, 인의 개념과 같아 보인다. 고대 동양 철학에서는 우주를 하늘(天), 地(땅), 사람(人)으로 나누어 보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은 모든 생명을 다 포괄한다. 원효의 요익중생 饒益衆生도 마찬가지이다.

우주(天)를 나타내는(符), 세 가지 상징(印)이란 원, 방, 각의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 상징을 말하며, 홍익인간이란 “널리 모든 생명체들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다. 하늘은 형체가 없어서 텅 빈 기운으로써 존재하는 세계이고, 땅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유형의 세계이다.

“재천성상, 재지성형” (在天成象, 在地成形) <주역> 하늘에서는 상이 이루어지고, 땅에서는 형이 이루어진다. 하늘과 땅의 구별을 <대학>에서 도와 덕으로 나눈다. 머리(首)를 밝혀가자는 도와 마음(心)을 바르게 쓰자는 덕은 명확히 구분된다.

칸트도 형이상학의 세계를 지혜와 영감의 세계인 ‘예지계’라고 하고, 형이하학을 오감 세계를 ‘감성계’라고 하며, 인간을 그 중간적 존재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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