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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빛과 그늘이 공존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

"빛과 그늘이 공존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만 깨우쳐도 그토록 선명한 흑백을 추종할 수는 없다."

이번 여름에는 "강한 나라는 어뗗게 만들어지는가"란 소제목을 달고 있는 양정무 교수의 <미술 이야기 2>의 제3장 '로마 미술'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거기서 로마 귀족들이 사는 개인 주택 '도무스'를 알게 되었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리스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의 프랑스어는 indiviuel이다. 이 말은 '분리될 수 없는'이란 형용사가 명사가 된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라는 휴머니즘, 이를 인본주의라고도 한다. 그 인본주의에서 개인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중요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 나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나는 부분이나 하부 시스템들로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내적 중심은 여러 겹의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껍데기들을 벗겨내고자 한다면,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단 하나의 분명한 내적 목소리를 발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나이다.
2. 진정한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3. 앞의 두 전제로부터,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내 내면에 있는 자유의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고, 진정한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에게 그토록 많은 권한을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나에 대한 선택을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유권자가 가장 잘 아는 이유, 고객이 항상 옳은 이유 그리고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정말 그럴까? 물론 유발 하라리는 다르게 말한다. 지금의 생명과학은 위에서 지적한 가정 세 가지 모두에 도전하고 있다. 생명과학은 이렇게 주장한다.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즉 인간은 여러 알고리즘들의 집합으로, 단일한 내적 목소리 또는 단일한 나는 없다.
2. 인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들은 자유롭지 않다. 이 알고리즘들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자유의지가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또는 무작위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3. 앞의 두 전제로부터, 이론상으로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잘 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내 몸과 뇌를 구성하는 시스템 각각을 관리 감독하는 알고리즘은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 알고리즘이 개발되면 유권자, 고객, 보는 사람의 눈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알고리즘이 가장 잘 알고, 알고리즘이 항상 옳고, 알고리즘의 계산에 아름다움이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 미래의 역사>의 논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생명과학 이전에 선동가들이 나서서 우리의 생각을 빼앗아 간다. 언제나 명쾌하게 논점을 정리하는 박선화 교수의 글을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박교수는 레오 뢰벤탈이 말한 선동가들의 특징을 소개하였다.
(1) 선동가들은 음모론, 즉 ‘당신은 속고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악마 같은 자들의 속임수에 의해 선량한 이들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며 억울함과 의혹을 부추기는데, 당시 서양 사회에선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뉴딜주의자 등이 주요 표적이었다. 혁명기 공산국가들은 자본가나 지식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2) 진보 정부란 무정부주의나 다름없다는 논리와 함께 세금 강탈에 대한 분노를 고조시키고, 당장 막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라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3) 외국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타지에서 들어온 흰개미들이 우리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하는 정부 역시 신뢰할 수 없다며 음모론을 더한다. 코로나19 초기의 선동가들이 떠오른다.
(4) 나와 의견이나 출신이 다른 이들은 기생충이나 파충류, 세균같이 응당 사라져야 할 적들이기에, 그들을 박멸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혐오를 부추긴다. 역사의 모든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5)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생각은 사치다. 진정한 개혁가이자 순교자인 내가 나서서 쓰레기들을 치워 주겠다. 그러니 어서 나에게 돈과 힘을 다오.”

약 100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요즘의 선동가들에 대한 묘사인 듯 생생하다. 종말론 교주처럼 당장 하늘이 무너질 듯 소란을 피워대는 이들이 노리는 것은 무얼까? 지금 나는 선동가들에게 속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박교수는 "선동가들의 시선과 관심이 머무는 최종 소실점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서민과 약자들 역시 단지 자신의 자기애를 드러내는 소재이자 유무형의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안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성숙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위기를 경고하거나 의혹을 제기하고 때로는 분노하지만, 공포와 분열의 언어를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
- 나와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를 조장하지 않는다.
- 부패와 폭력을 비난하고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열한 언행이나 잔혹한 처단을 원하지도 않는다.
- 무엇보다 자신 혹은 자신과 친밀한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해서 흠집 없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과신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간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박교수의 칼럼 마지막 문장이 빛난다. "빛과 그늘이 공존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만 깨우쳐도 그토록 선명한 흑백을 추종할 수는 없다." 다음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눈부신 빛 뒤편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찬란한 빛은 그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빛과 그늘은 늘 함께 한다. 모든 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듯, 그림자 역시 빛을 향해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선동가들처럼, 함부로 말하거나 혐오를 조장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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