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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배철현 교수의 <심연>을 읽으며 '위대한 개인' 되기 프로젝트 (10) "유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

단절이란 과거의 나를 과감히 버리는 용기이다.

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과학자들은 지구라는 별 또한 50억년 후엔 멈추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우주에서 시간이라는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에게 남겨지는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순간을 불교에서는 찰나라고 한다. [찰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순간을 나타내는 '끄샤나'의 음역으로 75분의 1초(약 0,013초)]

우주의 탄생은 이렇게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우주는 137억년 전, 빅뱅으로 시작된다. 10만분의 1초의 찰나에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원자로부터 터져나와 해일처럼 사방에 퍼지더니 물질, 에너지,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우주가 생성됐다. 빅뱅은 137억 년 동안 우주에 수천억 개 이상의 은하수를 수놓으며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천상의 장소라는 의미로 '시온'이라고 불렀다. 그 예루살렘이 기원 6세기 어느 날 바빌론 군인들에 의해 잿더미가 된다. 그때부터 신은 장소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대 지식인들은 깨달았다.

천체는 계절에 따라 가장 적절한 시간에 어김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 1장 1절: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태초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구절을 배철현은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처음이라는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처내기 시작했다."

혼돈(카오스)에서 질서(코스모스)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처음'이란 이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이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질적인 시간이고, 동시에 문지방, 현관이다.

창세기에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는 '바라(bara)'이다.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란다.

그러니까 '창조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chaos(한덩어리)를 처낸 것이 cosmos이다. 질서는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는 버리는 것이다.

안식일(sabbath) 이야기 좀 하자.
유대 지식인들은 양적인 시간이 아닌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그 일상을 새롭게 관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한다. 이것이 영어로 '사바스(sabbath)'라고 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그 본래 의미가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소주 "처음처럼"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관조가 '안식일'이다. '처음처럼'이 안식일이다.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날이 '안식일'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어제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저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과감히 잘라내자.
그것만이 우리를 다시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하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