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어느 날, 어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들 속에 던져지는 것 같다. 그래 나는 삼간(三間)이란 말을 좋아한다. 우리들의 삶은 '삼간',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사람(人)자 뒤에 간(間)이 붙는다. 그 인간(人間)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 '간'을 우리 말로 하면 틈, 사이, 간격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 시간 속의 짧은 틈과 무한한 공간 속의 좁은 틈을 비집고 태어나, 사람들 틈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삼간(三間)'이라 한다. 그러니 살면서 우리는 그 시간의 틈을 즐겁게, 공간의 틈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 사이의 틈은 사람 냄새로 채우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살다, 삶, 사랑'과 같은 어원이라고 한다. 즐거운 시간, 아름다운 공간에는 반드시 사람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랑 없는 시간과 공간은 균형이 깨진, '진짜' 삼각형이 아니다. 사람 혼자서는 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틈'이 필요하다. 그래 우리는 완벽함이 아니라 탁월함(아레떼)을 위해 애써야 한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다른 이를 압도하는 탁월함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탁월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탁월함의 완성은 자신의 한계를 깨겠다는 믿음과 확신과 함께 약간의 노하우(know-how)가 필요하다.
(1) 맥락을 읽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읽을 줄 모르면 이런 감각이 생기지 않는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고,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
(2) 압도적인 성실이 요구된다. 성실함은 평범해 보이지만, 가장 귀중한 재능이다. 거기서 신뢰가 나온다. 그 신뢰는 꾸준함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3) 쉽게 타협하지 않는 근성이 필요하다.
(4) 원칙을 뛰어넘는 결단력을 요구한다. 룰만 확실하게 지키면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탁월함을 키울 수 없다.
말이 삼천포로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던져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앎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求道者)가 되는 거다.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어쩐 점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이끌어가는 건 질문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좀비가 된다. 노인은 '꼰대'가 된다. 꼰대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반생명, 즉 생명과 완전히 반대이다. 반복되는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한 가지 더 잘 구분하고 분류하며, 알아간다.
"지식-지성-지혜의 인드라망". 인드라망이란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다. "인드라"라는 그물은 한 없이 넓고 그물의 이음새 마다 구슬이 달려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이다.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비추고 있는 밀접한 관계이다. 이것은 인관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이웃하고 의지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우리 말로는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이때 필요하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자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이다.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를 잘 분류해 보았다.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을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 지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고미숙의 멋진 분석이다. 잘 배웠다.
좀 더 나아간다. 기술지만 향해 달려가면 그 결과는 늘 전쟁과 폭력으로 이어졌고, 지성의 영역만 극대화하면 학벌이나 엘리트주의 등이 사회에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여전히 소유를 향한 욕망 그리고 지적 특권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다. 지적 특권이 작동하는 '사심(師心)'이 생긴다. 좀 알면 누구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거다. 가르친다는 건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라고 강요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기술을 좀 알아서 무얼 얻게 되면 더 많이 얻고 싶은 욕망을 제어할 수가 없다.
장자가 말하는 허심(虛心)으로 가게 하는 길이 지혜이다.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 속에는 이미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이미 정해진 마음으로 가르치려 든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한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허심(虛心)의 지혜 없이 지식과 지성만으로 살면 자아가 아주 비대해 진다. 고미숙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준다. "내가 원하는 노동으로 당당하게 살겠어요"가 아니라. 엄청난 거액의 돈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거다. 고미숙은 이걸 '자의식의 비만'이란 표현을 썼다. 이런 궤도를 타게 되면 이건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러고 나서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누린 다음에 오는 건 반드시 허무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더 목마르고, 마지막에는 허무에 몸부림친다. 이걸 고미숙은 '자기와의 완벽한 소외'라고 말했다.
이 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지식과 지성을 누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삶을 질식 시키게 된다. 이게 자기와의 소외 현상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와 소통하지 못하면 당연히 타인과 공감하기도 불가능하다. <서유기>에서의 손오공처럼 힘을 갖고 불명을 얻게 되고,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지혜가 없을 때 분노조절 장애가 온다. 분노가 조절이 안되고, 그래도 힘이 넘치니 폭력을 휘두른다.
지혜는 이렇게 비대해진 자의식을 덜어내게 해준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게 필요하다. 생명과 우주, 이렇게 방향을 바꿔 질문을 던져야 나라고 하는 이 개별적 자아에서 자의식과 의미, 가치들을 덜어 낼 수가 있다.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나의 자의식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생명이 뭐 지?'라 묻는 순간 생명이 펼쳐지는 우주, 자연에 대해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세계가 되는 거다. 고전을 읽으면서 존재와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고전 중 <<주역>>의 핵심은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하는 것이 진리'라는 거다. 모든 게 움직인다. 예를 들어, 모든 현상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이 리듬을 밟는 것이 법칙이다. 어쨌든 인간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과해야지, 봄, 여름, 여름, 여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공자의 주장은 '인(仁)'이다. '인'은 '어질고, 착하고', 이런 인간적 범위에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천지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봄에 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불교는 이 무상한 세계 안에서 자아는 없다고 말한다. '나'라고 해서 붙들 수 있는 실체, 고정된 어떤 욕망 그리고 '이걸 꼭 이루어야 된다', 이런 거은 없다는 거다. 그야말로 자아를 해체하는 지혜이다. 이렇게 해체하지 않으면 인간은 전쟁과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도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한다. 그 핵심이 자연의 리듬을 터득해서 변화롸 일치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인, 불교의 무상과 무아, 도교의 무위자연, 이것이 공교롭게도 BC 5세기 경에 동시에 출현한 사상들이다. 이런 고전들과 접속해야 지혜를 얻어, 지식과 지성과 순환시킬 수 있다.
순환이 중요하다. 봄, 여름에는 무얼 갖고 싶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을 가지고 무얼 하는 거다. 그러다가 가을과 겨울이 되면 이것들을 하나씩 덜어 내는 거다. 그래서 완전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은 삶에 대한 회한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상태, 그냥 죽음 자체로 충분한 거다. 이걸 고미숙은 '지혜의 인드라망'이라 표현했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지혜의 인드라망과 접속해야 한다. 지혜의 파동에 접속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전을 읽는 것이 그중 하나의 방법이다. 이 지혜의 인드라망, 다르게 말하면 '지혜의 앎'은 영성 세계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지평선이다. 지평선은 달려갈 수는 있지만 도달하지는 못한다. 도달할 필요도 없다. 그냥 끝없이 묻고 또 물으면서 우리는 한걸음씩 가는 그 길이 앎의 지평선이다. 그 지평선에 접속할 때 지혜라고 하는 우주의 파동과 마주치게 된다. 그 파동 속에서 매일매일 쓰는 <인문 일기>도 그 앎의 지평성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길이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로 더욱 더 하잔한 오후에 고미숙의 YouTue 강의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와 책으로 엮은 <<인생 특강>>을 읽고 정리를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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