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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더위를 이기는 길은 고요를 얻고 마음의 비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옛 어른들은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고요를 얻고 마음의 텅 빔을 얻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마음에 번뇌가 적고 몸에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이다. 우리는 이를 어려운 말로 적정(寂靜)이라 한다.

적정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 아니 열반의 경지이다. 이 적정에 이르면 더운 줄을 모르게 된다는 뜻일 테니 마음을 항복 받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테다.

마음을 항복 받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눈 앞에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이 숲 길을 조용히 걷는 일이다. 왜냐하면 숲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숲길에 이르면 뒤이어 저절로 뒤따르는 것이 충만한 행복감이다. 우리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걷는 우리에게 고요와 행복이 조용히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진 교회 종소리, 묻어 두었던 마음의 소리, 양심의 소리와 함께.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코로나-19로 많은 일정이 뒤틀렸지만, 평상심을 잃고 싶지 않아 고요와 비움을 생각하며 지낸다. 이런 어려운 상황일수록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전화상은 이런 말을 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부처가 되는 길, 즉 도(道)가 ‘평상심(平常心)’에 있다는 말이다. 평상심이란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기 본래의 마음이다. 그래서 평상심은 바람이 불지 않아 고요하게 있는 잔잔한 물에 비유되곤 한다.

그리고 남전화상은 ‘하고자 함이 없는 도(不擬之道)’를 이야기 하면서 평상심을 얻으려는 노력을 부정하였다. 위의 말을 이해하려면, '연주를 잘 하려는 것'과 '연주를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홀로 연주할 때의 평상심을 공연장에서 유지하려는 노력 자체가 평상심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잘‘ 연주하려는 노력은 역효과를 가져오고, 오히려 곡에만 몰입하여 연주를 하는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일체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바로 평상심에 따르는 행동이다. ‘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것이 평상심에 머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장자> 외편 제19편 "달생" 제4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귀신 같은 솜씨로 배를 모는 사공이 있길래 제가 물었습니다. '저도 배 모는 법을 배울 수 있나요? 그러니까 사공이 말하길 '헤엄칠 줄 알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물에 뜨면 배를 보지 않고, 배를 보지 않으면 배를 저을 수 있지요'라고 하는데,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공자는 대답했다. "네가 배를 보지 않는다는 건, 네가 물에 있다는 걸 잊는 것이다. 배가 물이 아니라 언덕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뜻이다.

활 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싸구려 기와를 걸고 쏘면 최대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황금을 걸고 내기 활을 쏘면 하나도 맞지 않는다. 기술은 같은데 놓치면 아깝다고 생각하는 집착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외물(外物)을 중시하여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무릇 외물(外物)을 중시하는 경우에는 내면의 마음이 소홀하게 된다."

사람들이 배를 모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건, 거센 물살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저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면 나와서 다시 하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배 모는 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실제 '잘못하면 어때. 다시 하면 되지.'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는 것이다. 연습할 때는 실전처럼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연습한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일해야 한다. '이번에 뭔가 보여주겠 어'라고 마음먹고 하는 일 치고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빌헬름 텔(Wilhelm Tell)이 아들의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활로 쏜 일이 전설이 된 건, 멀리서 조그만 목표물을 맞춘 게 신내림의 기술이어서 가 아니라, 자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다는 중압감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매우 강한 양궁 경기에서 과녁 정중앙의, 카메라를 숨겨 놓은 중심점 엑스텐(X-10)을 심상찮게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실력으로는 백발을 쏘면 백발 다 텐(10)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에 맞추지 못하한다면'이라는 중압감이다. 그 중압감을 누가 이겨내느냐가 늘 승부를 좌우한다. 그래서 양궁 선수들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인드 컨트롤이다. 단 한 발에 승부가 갈리는 긴장 속에서 마음을 비우는 훈련, 마음 비우기 이다.

이렇게 긴장을 풀고, 마치 남의 일 보듯 심드렁해 지는 그 순간, 문제의 해결이 보인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엉뚱한 순간에 멋진 답이 뛰어 나온다. 훈수꾼들이 늘 장기판을 더 잘 보는 이유도 같다. 내 일이 아니고 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장기판에 붙어 앉지 않고 약간 떨어져 앉아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거리 두기, 또는 마음 비우기 효과이다. 이번 코로나-19의 재유행으로 강제된 거리 두기에 마음을 비우면, 새로운 길이 나온다.

"빈방에 빛이 들면(虛室生白, 허실생백), 좋은 징조가 깃든다(吉祥止止, 길상지지), 마음이 그칠 곳에 그치지 못하면(不止, 부지) 앉아서 달리는(坐馳, 좌치) 꼴이 된다."(<장자>, "인간세")

빈방에 빛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멈춤도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 앉아서 달리는 꼴이 된다. 앉아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만 바쁘지 백날 가도 제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