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유 화두를 다시 이어간다. 삶을 여행(旅行)으로 보느냐, 여정(旅程)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배철현 교수가 쓴 <심연>이라는 책의 다음 구절을 보고 알았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여정은 기분에 따라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과 달리 자신이 정말 가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그런 장소를 행해 가는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방향인 동시에 목적지이므로 감동스럽습니다."
'위대한 개인'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과 속성을 회복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자이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보인다." (요한 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요한 3:4)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인간이 어머니 뱃속이라는 '물'에서 태어나는 자연적인 탄생을 뜻하고, 두 번째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탄생과 깨달음을 가리킨다.
성령(聖靈)이란 무엇인가? 그건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부여한 생기(生氣)이다. 이 생기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신의 형상'의 DNA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두 번 태어나야 하는데, 한 번은 어머니의 자궁, 즉 '물'에서부터의 탄생이고, 다른 한 번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과 속성을 회복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와 더불어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제한된 시, 공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내 안의 신의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거룩한 여정이 바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습이다. 이를 장자는 '오상아(吾喪我)'니, '심재(心齋)'니, '좌망(坐忘)'이니 하는 말로 말하고 있다. 의식의 변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자를 말하니 기독교와 장자의 철학이 서로 통한다.
어쨌든 우리 인간의 삶은 '신의 형상'이 숨겨진 자신을 향한 쉼 없는 여정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단테는 이러한 여정 속에서 그의 명작 <신곡>을 쓰게 된다. 그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게 <신곡>의 '지옥편'이다. 그곳은 바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저지를 죄악이 적나라하게 쌓여 있는 지옥이었다. 단테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무절제와 폭력 그리고 사기라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는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인 연옥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무절제와 폭력 그리고 사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 의미에서, 배철현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단테의 지옥 여행[여정]은 자신의 영적 승화를 갈망하는 인류의 등대"라 했다.
이러한 여정의 시작인, 탈주 아니 이주의 목적은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결별하는 일이다.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단테처럼, 우리는 자신의 죄가 가득 쌓인 '자기 마음'이라는 지옥으로 과감히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 이슬람 공동체를 만든 무함마드와 팔레스타인 청년 예수이다.
무함마드는 당시 최고의 대상 무역 도시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메카 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풍요가 최고의 삶이라고 여겼다. 당시 종교들은 이 풍요로운 장사로 사익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메카 외곽에 있는 산에 올라가 무엇인 인간다운 사람인지에 대해 묵상했다. 그런데 40일이 되던 어느 날, 그는 처음으로 마음 속에서 나오는 섬세한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의 내용은 '너는 우주를 창조하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을 만든 존재가 있다. 그 분이 바로 너의 주인이다. 그분이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너와 상관 없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네 주인의 말을 귀 기울여라'이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40일이라는 기간, 외곽의 있는 고독한 공간의 산 속이다.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격리라는 quarantine(40일)에 나는 주목한다. 차이가 있다면, 자발적 격리이냐 강제적 격리이냐 문제이다. 무함마드가 거기서 감지한 거룩한 소리가 <코란>이다. 배철현 교수의 멋진 표현에 따르면, <코란>은 "인간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마주한 자신만의 신[주인]과 대화하는 시간이며, 그 깨달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한 편의 시(詩)이다." 내 삶이 한 편의 시(詩)가 되게 살아야 한다. 그건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내 주인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 깨달음이 일어나면, 이주(移住)해야 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강제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의 이주한다는 말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며, 자신의 불편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일이다. 자신의 비우는 일이다.
예수도 위에서 말한 '영적인 이주'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경우이다. 예수는 로마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하루하루를 '목수'로 연명하던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주 의례를 통해 자연적인 인간에서 신적인 인간으로 변모한다. 하나는 세례(洗禮)이고, 다른 하나 40일간의 금식이다.
세례는 혼돈을 상징하는 물속에서 완전히 빠졌다가 그곳에서 빠져나와 빛과 질서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의례이다. 혼돈이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환경을 상징한다. 질서는 자연의 환경을 곰곰이 살펴 제정비하는 행위이다. 현대 인문학에서는 이걸 '재배치'라는 말로 쓴다. 예술(art)이라는 어원이 'ars(아르스)'인데, 이 말도 '질서 잡기'이다. 그러니 다시 태어난 자는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에서 40일 간의 금식은 성령(聖靈)이 주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에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라 쓰여 있다. 여기서 성령이란 예수 자신 안에 존재하는 거룩한 소리를 말한다. 그리고 사막은 자신을 익숙한 공동체로부터 이탈시키는 강제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의도적인 행위이다. 거기서 예수가 깨달은 것이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이번 코로나-19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40일간의 회개 기간으로 여기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다른 것으로 이주하며, 자신 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룩한 소리를 듣는 시간으로 여겼으면 한다. 그렇게 하여 내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신의 모습을 감지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나는 이 걸 '참 나 여행'이란 명명하고, 오랜 기간 이 여행을 하고 있다.
인생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말하는 나(3인칭으로서의 나)'와 '내 자신(1인칭으로서의 나)인 나'가 있다. 잘 보면, 나는 우연히 던져진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환경을 통해 내가 되었다. 그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을 통해 투영한 '그들의 나'이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이다.
나 자신, 진아(眞我)인 '아트만'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는 소문자 atman으로 경험적 자아라 한다. '나'라는 개별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어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아(自我)이다. 윤홍식은 이걸 '에고'라 한다. 이 에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 세계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배철현 교수는 그런 사람을 "무식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대문자Atman으로 삼라만상의 근원인 '브라만'과 일치하는 '초월적인 자아'이다. 윤홍식은 그걸 '참나'라고 한다.
장자가 말하는 "오상아(吾喪我)"가 생각난다. '나를 잃었다'는 이 말은 '내가 나를 장례 지낸다(이 말은 '성심(成心)'을 버린다는 말로 보면 좋다)'고 보는 것이 더 잘 이해가 간다. 다시 말하면, 나를 잃음은 나를 비움의 상태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이를 '오상아'로 표현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self)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아, 큰 자아(Self)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의식 상태로 설명하면, 일상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꽉막힌 자의식에서 탁트인 우주 의식(cosmetic consciousness)으로 변한 것이다.
'오상아'는 옛 자아가 죽고 진정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근본적인 의식의 변혁을 그리스어로는 메타노이아(metanoia, 마음의 변화, 영적 회심, 회개)라 한다. 장자의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앞에서 이미 말했던 心齋(심재, 마음 굶김, 마음 비우기)이나 坐亡(좌망, 앉아서 잊어버림)과 궤를 같이한다.
Cogito ergo Sum(=Je pense, donc je suis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대신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Obliviscor, ergo, sum),'가 된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 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몸이 마른 나무 같이, 마음이 죽은 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을 사자성어로 '고목사회(槁木死灰)'(<장자>, "재물론")라 한다. 사람의 무위무심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이다. '고목사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관(止觀)이라는 명상법을 상기시킨다. 여가 지(止)는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적정(寂靜)해진 상태이며, 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살상(실상)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적막하여 감정이 없는 상태로 있는 그대로 보는 상태이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停止)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사마타'라고 한다. 그러면 거기서 사물에 대한 직관(直觀)과 통찰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산스크리어로 '비파샤나'라고 한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 정(定)이고, 그렇게 되어 눈이 밝아진 것이 '혜'이므로 이를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이른바 삼매(三昧)와 반야(般若)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喪我), 무아(無我), 망아(忘我), 망기(亡己)라는 자기 초월의 경지에 들어가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 인식 능력(特殊 認識 能力)의 활성화(活性化)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긴 글이다.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마음 먹고 정리한 글이다. 참고로, 吾喪我에서, 吾는 '참나의 나 ‘진아’, ‘상아’, ‘진재’, 참주인이고, 我는 나, 우리, 외고집, 성심, 정해진 마음, 에고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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