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문화연대 6월 대청호 이어걷기를 다녀와서. - '탈주'로 '법'을 얻다.
대전문화연대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대청호 오백리길을 이어 걷고 있다. 이번 6월은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제14구간을 걸을 차례였다. 그곳을 가려면 옥천을 거쳐 보은으로 간다. 무슨 일인지, 이 번 걷기 참가자는 나 목계를 포함해 단지 세 명뿐이었다. 긴강님, 은난초님 그리고 나. 모처럼 새로 구입한 내 차로 내가 운전했다. USB에 담은 좋은 노래를 들으며 평화로운 호숫가를 달렸다. 중간에 멈추고는 각자 싸온 김밥 등을 한적한 어떤 동네의 정자에서 즐겼다. 동네 어른에게도 김밥을 건네고, 남부럽지 않은 '거한' 먹거리로 배를 채우고, 수업 빼먹고 땡땡이 치기로 하고, 우리는 예정된 걷기 코스가 아닌 속리산의 법주사로 가 '색다른' 걷기를 하기로 작당하였다. 난 그곳에 있는 맛집을 안다고 하며 우리들의 일탈, 아니 파격의 기쁨에 기름을 부었다. 그렇게 우리는 '탈주'를 꿈꾸며 일탈했다.
탈주(fuite)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처음 사용하였다.기존의 배치 안에서 고정되거나 강제되는 것에서 '벗어나 달리는 것',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를 포함한 개체들을 가리켜 '차이의 생성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정의하면서, 이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할 때,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은 '탈영토화'이며,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이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탈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난 탈주라는 말에서 '파격'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덕수궁 박물관 청자 연적, 거기에 새겨진 질서정연한 꽃잎들, 그 질서를 깨고 약간 꼬부라져 있는 꽃잎 하나, 그게 파격이다. 파격의 반대말이 엄격이다. 격 맞추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격은 마차를 연결하는 나무나 네모난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격자무늬 나무 막대기나 나무틀은 딱딱 맞추는 게 최고의 미덕이다. 안 맞는 걸 억지로 욱여넣으면 어디서든 사달이 난다. 수레가 끊어지거나 바람이 새고, 창 문틀이 부서진다. 사람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끔씩 파격, 즉 격을 깨지 않고 창조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탈주를 꿈꾸고, 파격을 택한 것이다. 대청호 이어걷기를 벗어나, 같은 보은에 있는 법주사로 간 것이다.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는 법이 안주할 수 있는 탈 속의 절이란 뜻이라고 한다.
'법'은 서양 언어로 말하면, 로고스이고, 쉽게 말하면 이 자연, 아니 이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로 진리라고 이해한다.
좀 이해하고 있는 법 이야기를 좀 하자. <아함경>에 4성제(네 가지 높은 깨우침= 네 가지 고귀한 진리)가 나온다. 석가모니가 깨달으신 것이란다. '고(고통)은 집착의 원인이고, 도(인간의 길)은 멸(해탈, 열반, 미르바나)의 원인'이다. 좀 알지 못하는 내 식으로 말하면, 집착을 버리면 삶이 주는 고통을 벗어날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올바른 길을, 에고의 욕심이 아니라, 참나의 양심으로 살아가면, 지금, 여기 있는 곳에서 열반의 상태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짧게 말하면,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오고, 고통을 소멸시키는 수단은 '도'다. 이 것을 '고집멸도'라고 한다.
일체개고,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 이렇게 외우고 있다.
당황하셨지요. 법이란 흔히 잘못을 저질렀을 때 들이대는 잣대란 말로 쓰인다. "법대로 해!'하면 그 동안 순리대로 풀어가려고 했던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사전을 보면, 법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정의를 실현함을 직접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관습을 말한다. 하지만 법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물수에 갈 거자가 합쳐진 단어이다. 그러니까 법이란 말 그대로 하면 물 흐르듯 순리대로 풀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즈음 법이라고 하면, 물처럼 순리대로 풀어나가는 방편이 아니라 순리대로 풀어나가지 못할 때 단죄를 하는 도구로 쓰인다. 안타갑다.
우리가 읽는 법이란 말은 법대로, 물 흐르듯이 살라는 말이다. 속리산 법주사에 생각했던 것이다.
절이 종교적 공간이라기 보다는 사찰이라는 사업공간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입장료가 무려 1인당 4천이라는 것이고, 법당 안에 기도 메뉴판이 버젓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각자 얻은 것들을 회향한다는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왠지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뭔가 공짜로 부처님에게 혜택을 얻으려는 인간들의 욕심을 기도하는 사람들에거 엿보인 것은 내가 가진 편견일 것이다. 금칠한 커다란 부처의 모습에 신자유주의가 펼치는 자본의 힘을 느낀 것도 내가 가진 '비딱하게 보기'의 인문정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속리산 문장대로 올라가는 숲길을 1시간 이상 걸었다. 그리고 절을 나와, 그 근처에서 아주 오래전 부터 맛집으로 알려진 <경희식당>에 갔다. 단일 메뉴인 한정식이 1인당 25,000원이었다. 비쌌지만, 여기까지 와서 주저할 이유는 없다고 서로 눈짓으로 동의하고 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버섯과 나물 위주의 밥상이라 '법대로' 하는 식사였다. 엄청 먹었지만, 몸이 부담스러워하진 않았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고, 있는 곳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면, 그곳에 '법'이 자리한다고,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고 휴식모드로 오침을 했다. 난 잠깐 누운 것 같았는데, 피곤한 몸이 풀렸다. 그러나 다 좋은데, 그 식당에 일하는 사람들이 영혼이 없어 보이고, 단지 일하는 기계 같았다는 점이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주인 문제이다. 좀 신나게 일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식사 후, 긴간님과 은나초님은 기념품 가게에서 나무로 만든 빗을 샀다. 그것으로 머리를 긁으면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경이 회복되어 머리를 안 아프게 하고, 정신이 바짝 든다는 것이다.
약 1시간 30분의 운전 후에, 우리는 내가 농사짓고 있는 <예훈농장>에 와서 약간의 야채를 수확하여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가장 흥미로운 수확은 자색 감자였다.
탈주를 꿈꾸며, 파격이 낳은 즐겁고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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