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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빛은 출발할 때부터 어디 도착할지 알고 있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남은 인생동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빛은 출발할 때부터 어디 도착할지 알고 있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방향을 수시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내일부터 2박 3일간 제주도를 간다. 여행 중에 아침 글쓰기를 못할까 봐 미리 3일동안의 글 밑그림을 고민하다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만났다. 아침에 내가 쓴 글을 공유하기 전에 내 페이스북의 <과거의 오늘>을 열면, 몇 년 전부터 오늘 내 담벼락에 올린 글들이 모두 다 다시 나온다. 그러면 나는 그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인문운동가 박한표의 '사진 하나, 시 하나'>라는 그룹에 다시 올린다. 그 외의 글은 나의 네이버 블로그에 다시 저장한다. 오늘 아침은 이런 글이 나왔다.

로마에선 패전하고 돌아온 장군을 다음 전쟁에 다시 내보냈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는 승자 독식 사회이고, 한 번 실패하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 우리는 패하고 돌아온 장수 목을 뱄고, 일본은 장수가 알아서 할복을 했다. 서양인들의 면접에서는 완벽한 사람보다 실패의 경험이 있고 그것을 극복해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높이 산다. 우리 면접에서는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높은 성취를 이뤄낸 이야기를 높이 산다.

"방황이나 실패를 역병처럼 피하는 문화는 유턴도 오솔길도 없는 '고속 도로'밖에 건설하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토목공사 밖에 하지 못한다." "많은 인생의 현자들, 즉 노인들은 삶에는 반드시 고난도 포함되어야 하고, 고난이 없다면 충만한 삶을 살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코넬 대학교의 칼 필레머 교수는 '인류 유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얻은 것이란다. 방황하고 우회하고 전쟁에서 패한 뒤에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건 침전의 시간에 벼려진 값진 것이다. 졌다고 좌절하지 말고, 밝을 때가 있으면 어두울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3일 동안 데이비드 부룩스가 말하는 '<두 번째 산>을 발견하고 오르기'에 대한 사유를 펼칠 생각이다. 허기를 채울수록 공허함을 느껴야 하는, 행복하지만 기쁨을 잊은 우리들에게 '두 번째 산'의 지도는 남은 내 생애의 훌륭한 이정표가 될 듯하다. 이 야기는 시 다음으로 옮긴다.

오늘 아침 공유하고 싶은 시는 마경덕 시인의 <신발론>이다. 왜냐하면 어제 나는 딸과 함께 나가 운동화 하나를 샀다. 산을 오를 목적이 아니라, 산책을 하거나 들판을 걸을 때 신을 생각이다. 특히 2박 3일 간의 제주 여행에 필요해서 구입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신었던 운동화를 다 내다 버릴 생각이다. 딸이 안 신는 것도 같이 다 버릴 생각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계룡산에서 찍은 것이다. 기도들이 모여 노란 단풍을 만들었다. 빛이 들어 그 모습을 보는 내가 기뻤다.

신발론(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 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재로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신발(履)’를 끌고 온 역사(歷)의 기록(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기'라는 말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심한 경우에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운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예리성 曳履聲)가 들리면, 버선발로 뛰어나간다.” ‘신발을 신을 틈이 없이 달려 나가야만, 아니 자신의 온 존재를 벗어 놓은 채 달려 나가야만 완전하게 그리운 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강가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왜 그럴까? 신발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대지는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더이상 신을 신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오늘도 신을 신고,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어제에 이어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데이비드 부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기쁨의 몇 가지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인생이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즉 인생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고 의미심장하며 또 가장 완벽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의 감정이 기쁨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런 기쁨에도 제각기 다른 여러 층이 존재한다고 하며 기쁨의 단계들을 나누고 있다.

첫 번째가 신체적인 기쁨이다. 어떤 신체 활동을 할 때, 특히 다른 사람들과 리듬을 맞추어서 신체 활동을 할 때 몰입 상태를 경험하는 순간을 말한다. 두 번째 기쁨의 층위는 집단적인 열광, 무언가를 기념해서 추는 춤이다. 이런 종류의 기쁨에서는 자의식의 담장이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나로 녹아 든다. 이런 종류의 기쁨은 오로지 현재형 시제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에 온전히 사로잡히며 또 그 순간 속에서 온전한 생명력으로 반짝인다. 세 번째 기쁨의 층위는 감정적인 기쁨이다. 예컨대 방금 자기가 낳은 아기를 바라보는 산모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것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랑의 분출이다. 네 번째 층위는 정신적 기쁨이다. 때로 기쁨은 움직임이나 사랑을 통하지 않고, 끝 간 데 없으며 한없이 순수한 정신으로 보이는 어떤 것과의 예상치 못한 접촉을 통해 온다. 이게 정신적 기쁨이다. 다섯 번째 층위는 초월적인 기쁨이다. 이것은 지연이나 우주 또는 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자아를 초월해서 무한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기쁨이다. 마지막 이 기쁨은 앞의 것들과 달리 영원할 수 있다. 이런 기쁨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도덕적인 기쁨으로 자기를 온전하게 내려놓은 사람들은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자기가 해야 할 처신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면의 빛을 가진 사람들이다. 도덕적 기쁨은 사회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고양(moral elev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피도처럼 밀려오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달리는 느낌
- 깡충깡충 뛰면서 소리 내어 깔깔 웃는 느낌
- 무언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느낌
-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말을 들려주는 느낌
- 아름다운 시나 사랑 노래의 가사를 쓰는 느낌

이런 식으로 정신이 고양되는 기쁨이다. 이런 도덕적 고양의 강력한 순간들은 정신적인 리셋(재설정) 버튼을 눌러서 모든 냉소적인 감정들을 싹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희망과 사랑과 도덕적인 영감으로 채우는 것과 같다. 이런 고양의 순간들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역시 어떤 좋은 일을 하겠다는, 두렵지만 실천하고 희생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강력한 동기 부여를 느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인격(人格, character)은 변한다. 사람의 본성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이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그게 아무리 작은 변화라고 해도 우리는 바뀌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는 조금씩 더 고양되거나 또는 타락한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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