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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단풍은 왜 저렇게 붉을까?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12일)

오늘 오전에는 그 바쁜 틈을 이용해 장자 읽기를 한다. 지난 11월 8일까지 나는 장자가 말하는 도(道)에 이르는 9개의 계단 중 네 번째인 '섭허(攝許)'를 이야기 하다가 멈추었다. 섭(攝) 자에 꽂힌 거다. 攝(섭) 자는 손 수(手)와 소곤거릴 섭(聶) 자의 결합이다. 여기서 섭(聶) 자는 귀(耳)를 중복해서 그린 것으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소곤거리는 소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기에 여기에 손 수(手) 자를 결합한 섭(攝) 자는 '잘 들리지 않아 손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한 마디로 하면 '귀담아 듣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섭허'는 '귀담아 들어 잘 알아차림'이 된다. 글이나 말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 알아듣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늘 어렵게 느껴지는 '섭리(攝理)'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 했다. 오늘 아침은 '통섭(統攝)' 이야기를 하려 한다.

도(道)에 이르는 9 계단라는, '도가구계(道家九階)'의 9 계단을 다시 한 번 더 소환한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①부묵, 副墨)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②낙송, 洛誦),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 핀 다음(③첨명, 瞻明),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 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④섭허, 攝許),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⑤수역, 需役),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⑥오구, 於謳).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⑦현명, 玄冥), 조용하고 텅 빈 경지(⑧삼료, 參廖)를 체험한 다음 시원(始原)의 도(⑨의시, 疑始)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계단 중, 지금 우리는 4층을 건너가고 있다. 섭자에서 영감을 받아 오늘은 통섭(統攝) 이야기를 하려 한다. 통섭을 말하려면 인문정신을 좀 이야기 해야 한다. 인문 정신이란 ‘전진하는 분석’과 ‘후퇴하는 종합’, 즉 통찰하는 정신이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총체적으로 모두 훑어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인문 정신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잘 볼 줄 알게 해준다. 그래서 통찰은 두 가지 의미이다. 영어로 말하면 insight, penetration이고 overview이고, 한문으로는 통찰(洞察)이면서 통찰(通察)이다. 이러한 통찰의 힘을 기르는데 최고의 자양분이 인문학, 후마니타스(humanitas)이다. 진정한 통찰의 힘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문 없이 우리가 통섭이라는 말을 하면, 이 통섭(統攝)과 이 통섭(通涉)이 오버랩 된다. 차이를 보기 위해 사전을 찾았다. 앞의 통섭(統攝)은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이고, 뒤의 통섭(通涉)은 '사물에 널리 통함'이라 정의하고 하고 있다. 실제 생활 속에서는 통찰과 융합이 혼돈을 낳는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이 2005년에 한국에 번역 출간되면서 통섭(統攝)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은 "실제로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별개로 확립되어 있는 분야들을 종합(synthesis)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윌슨은 각각 전문화되어 있는 학문 간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가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간단히 말해, 통섭은 근대에 이르러 대학이 대중화되면서, 학과가 다양해지고 지식이 세분화된 상황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이다. 그래서 나는 이 통섭(統攝)이 아니라, 이 통섭(通涉)에 대해 오늘 말하고 싶은 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여기서 마음에 드는 말이 '섭(攝)'자이다. '섭'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여기에 '손(手)'이 결합되어,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는 '섭' 자는 좋은 데, '통(統, unity)'이 불편하다. 차라리 한문을 이 '통(通)자로 하면 좋겠다. 윌슨이 말하는 '통섭'이란 말에는 다학제(多學制), 간학제(間學制)로 쓰이는 데, '화학적'이라기 보다 '물리적'인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책을 번역한 최재천 교수는, 다학제, 간학제를 넘어 이제는 진정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영어의 올(all)이 아니라 '드랜스(trans)'를 범(凡)이라는 거다. 영어 'trans'는 말 그대로 하면 '변화(translation)'이다. 한국어판 부제의 "지식의 대통합"을, '모든 지식을 다 공부해서 묶는다'로 읽으면 안 된다는 거다. 가능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통섭은 단지 질적 변화인 횡단(橫斷, trans/versal) 작업이어야 한다. 위계(hierarchy)가 끼어들면 안 된다. 그러니까 통섭과 우리가 말하는 융합과는 다소 다르다.

융합(融合)은 말 그대로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 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과 절충(切充)은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합한다고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을 나열하는 절충은 '가장'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에서 '제일' 좋은 것만 나열하는 사고방식이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반대 개념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충돌과 모순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를 절충으로 해소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좋은 말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갈등 봉합이 주요 목적이다. 충돌 과정을 없애는 것이다. 절충이 대개 지당하신 말씀, 진부한 표현, 영혼 없는 연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절충에는 좋은 것들 둘 다 가졌다는 '자기 위로'만 있다. 즉 현실에서 불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에 실행력을 가질 수 없거나, 실행된다면 반사회적 언설이 된다. 물과 기름은 절충될 수 있어도 융합 될 수 없다, 물과 기름이 분리된 채 컵에 담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절충), 융합은 계면 활성제(界面活性劑)를 사용하거나 기름의 입자를 나노 크기(10억분의 1m) 정도로 줄이는 과정을 통해 마요네즈 같은 제3의 물질을 만들어 내는 거다.

오늘 오전에는 모처럼 함께 <<장자>>를 읽었다. 메마른 영혼의 밭에 단비를 맞는 듯, 뿌듯했다. 네 명의 벗(친구, 友)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시아와인트로피 입상 미수입와인 등을 시음하는 행사인 <대전 와인 서밋>에 가볍게 참석하여 헝가리의 다양한 토카이 와인과 슬로베니아의 오렌지 와인 등을 만나고 왔다. 그리고 가는 가을을 실컷 만끽하려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토카이> 와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다면, 나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30일자를 보시면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에서 각자 최대한 폼을 내고 있는 단풍들을 만났다. 단풍은 물들지 않는다. 본색을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단풍은 왜 저렇게 붉을까? 이제껏 숲을 드나들며 퍼덕거리던 날벌레들마저 졸음에 겨운 눈으로 스스로 제집을 지어 숨어드는 때에, 저 홀로 미친 듯이 저렇게 불타오르는 무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 빨간 물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단풍은 물들지 않는다. 본색을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가을 나뭇잎은 봄과 여름에 입고 있던 자신의 색깔을 벗고 본색을 드러낼 뿐이라는 거다. 과학자들의 말이다.

빈섬 이상국이라는 분의 블로그 만나 이런 귀한 정보를 얻었다. 종종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여 공부하고 싶다. 그에 의하면, 나무는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과 잎으로 빛을 이용해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만드는데, 가을이 되면 햇빛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들어 그 이전처럼 제대로 광합성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여름날 우거졌던 잎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질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때 나무는 줄어든 햇빛의 공급을 따져,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 우선 잎으로 나가는 물의 공급을 줄인다. 물 관을 막는다는 이야기이다.

여름철 짙은 녹색으로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수분이 줄어들면서 엽록소를 잃기 시작한다. 엽록소는 파랑색이나 붉은 색, 노랑색의 파장을 흡수하고 녹색의 파장을 반사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엽록소가 죽으면서, 그것에 가려져 있던 붉은 색과 노랑색, 혹은 그것을 합친 갈색이 드러나는 거다. 이른바 단풍은 물드는 게 아니라, 잎의 본색을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 거다. 가을은 그런 거다. 자기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거다. 고운 단풍을 만나면, 생각나는 시이다.

단풍 드는 날/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아는 순간부터
나무가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방하착: 내려놓다,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의 불교용어

<<장자>>의 '섭허'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다. 섭허의 '섭'자에 꽂히어, 섭생, 섭리 이야기를 거쳐, 지금은 통섭(concilience)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concilience를 최재천 교수가 동섭(統攝)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인구에 회자된 단어이다. 말 그대로 하면, 큰 줄기(통)를 잡다(섭), 즉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이해한다. 상지대 최종덕 교수에 의하면, "최재천 교수는 원효의 화쟁사상과 성리학, 최한기의 통섭 등을 거론하며 'consilience'의 개념이 일반인으로 하여금 마치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인 관점의 합일 수준인 양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통섭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統攝보다 이 通涉을 더 좋아한다.

융합은 제 3의 지식, 변형된 물질이 되어야 한다. 그래 퓨전 혹은 용광(鎔鑛)과 비슷한 것이다. 융합은 '범학문'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다.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앎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융합은 '횡단적 사고, 사선(斜線)으로 보기, 크로싱, 조우(遭遇, 우연히 서로 만남)' 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대립하는 논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융합은 충돌을 지향한다. 합치지 말고, 충돌하는 양상을 질문해야 한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jumping together)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융합은 모든 지식을 습득한 다음, '녹여서 합하는 것'이 아니다. 융합의 가장 근접한 의미는 다음 한자어의 통섭(通攝)이다. 이 한자어의 통섭(統攝)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 융합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학과별로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대두한 전인적 교육의 필요성, 둘째는 서구 남성 중심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새로운 사유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즉 다른 생각과의 접촉, 그  닿음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충돌이 융합의 주요 요소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대화에서 최선은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이해도 쉽지 않다. '머리'가 아니라 존중과 열린 마음, 지적 호기심, 인격이 갖추어 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융합은 타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확장하거나 공통점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지식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 지식의 쓸모와 가치에 관한 논쟁이다. 봉건 시대를 넘어서 신, 신분 질서, 자연을 물리치고 인간이 앎의 주체가 되면서 지식은 다다익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 자체가 숭배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계몽(啓蒙, des lumières)주의가 나온다. 많은 지식으로, 특히 백과사전 식의 지식으로 무지 몽매한 대중에 빛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21세기에 와서, 이제 우리는 많은 지식보다 지식이 왜 필요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이 내가 인문운동을 하게 된 계기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요일 <인문일기>로 넘긴다. 여기서 멈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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