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28일)
어제에 이어, 노자 <<도덕경>> 제38장의 후반부 정밀 독해를 한다.
上仁爲之而無以爲(상인위지이유이위) 上義爲之而有以爲(상의위지이유이위) 上禮爲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 則攘臂而扔之(즉양비이잉지): 높은 인(사랑)은 강요하나, 의도는 없다. 높은 의(정의)는 강요하고, 의도도 있다. 높은 예(예절)는 강요하고, 따르지 않으면 팔뚝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따르게 한다.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 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 그러므로 도(道)을 잃자, 덕(德)이 나왔고, 덕을 잃자 인(仁)이 나왔고, 인을 잃자 의(義)가 나왔고, 의를 잃자 예(禮)가 나왔다.
어제 우리는 "상덕"과 "하덕" 이야기를 했다. 훌륭한 덕(상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도에 입각하여 살아가므로 자기 행동 마저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행동이 고침이 없고 구태여 억지로 일을 꾸며야 할 이유도 없다. 반면 훌륭하지 못한 덕(하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꾸미고 잔뜩 일을 벌여 놓는다.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고 뭔가 해 놓아야 될 것처럼 조바심이고 늘 초조해 한다. 그러나 멀리 보면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 한 마디로 상덕(上德)의 사람은 무위(無爲)의 사람이고, 하덕(下德)의 사람은 유위(有爲)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유위'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인의 사람(上仁)", 의(上義)의 사람, 예(上禮)의 사람을 들고, 특히 예의 사람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예는 진정으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은 없이 겉치레로 남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형식으로 서의 예를 말한다. 사실 이런 피상적이고 천박한 뜻으로 서의 예가 강조되는 사회는 생명력이 없는 사회이다.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하는 삶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사회에서 떠받드는 고루한 윤리 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 매끈하게 꾸미려는 '처신'의 문제가 주관심사가 되어 버린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창조성이나 자발성은 없고 어떻게 든지 남의 눈치나 살펴 가며 남 하는 대로만 따라가려는 일률적 획일성만이 판치게 된다. 노자는 이런 약삭빠르고 얄팍한 예의 껍질을 깨어 버리라고 한다.
"앙비이잉지"에서 "앙비"는 '팔뚝을 걷어붙인다', '소매를 걷어붙인다'는 뜻으로 쓰인다. 도올은 우리들의 번역과 달리, "앙비"의 '비가 상대방을 팔뚝으로, 상대방의 팔뚝을 낚아채서 그것을 끌어 당긴다'로 해석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팔뚝을 걷어붙이고 상대방을 끌어 잡아당겨서 예를 실행하도록 강요한다는 것과 다르다.
夫禮者(부례자) 忠信之薄(충신지박) 而亂之首(이란지수): 예라는 것은 진심과 믿음의 얇은 껍질이며, 혼란의 시작이다.
前識者(전식자) 道之華(도지화) 而愚之始(이우지시): 남보다 많이 아는 것은 도의 관점에서 화려한 꽃일 뿐이고,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是以大丈夫處其厚(시이대장부처기후) 不居其薄(불거기박) 處其實(처기실) 不居其華(불거기화)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그래서 대장부(큰사람)는 그 두꺼운 실속에 처하지, 그 얇은 껍질에 머물지 않는다. 그 내실 있는 열매에 처하고, 그 화려한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저 허상을 버리고 이 실체를 취한다.
"夫禮者(부례자) 忠信之薄(충신지박) 而亂之首(이란지수)"는 예(禮)의 형식주의, 인성을 구속을 비판할 때 잘 인용되는 구문이다. 이런 식의 예는 모든 "혼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피상적인 것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식자(前識者)"에 대한 왕필의 주석으로 보면, "전식자라고 하는 것은 남보다 먼저 안다고 까부는 자들인데, 하덕의 패거리들이다." 도올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시사 프로에 나와서 혹세무민하는 자들, 예언적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뻥치는 자들, 이들이야 말로 세상을 망치는 자들이다." "도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전식자"의 반대 개념이 "대장부(大丈夫)"이다. 이 말은 <<도덕경>> 내에서 여기 한 군데만 나온다. "대장부는 박화(薄華)에 거하지 않고, "거피취차(去皮取此)"하는 도의 덕성을 지닌 인물이다.
예(禮)와 지식(識)은 다른 사람을 타이르고 인도하는 수단이 되곤 한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타인의 삶에 끼어들 권리는 없다. 누구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며 훈계하거나 지적해서도 안 된다. 그 훈계와 지적 속에는 편견과 선입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가장 무서운 개 중에 무서운 것이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이다. 편견과 선입견은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경우 속에서 나온다. 그 중에 하나만 결핍되어도 편견과 선입견이 나온다. (1)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2) 상상력 부족 (3) 오만과 자만심 (4) 공감 능력의 부족 (5) 삶의 내 외부 균형 상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태들에 대하여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고집스런 내 편견과 선입견을 사슬을 끊고 풀어헤치려"는 목적이다.
노자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한다. 나아가 누구를 동정하거나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대하며, 각자의 색깔과 향기를 갖고 살기에 그 삶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예의와 지식으로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행위의 덕목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인의예지'는 질서정연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유교의 방법론지만, 노자는 이것이 타인의 삶을 억압하는 윤리라고 지적한다. 이런 윤리가 발생하기 이전의 사회는 도(道)와 덕(德)으로 구동되었다. 도덕의 세상은 무위의 세상이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無爲) 세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의도(以爲)가 없는 세상이 도덕 정치철학이 구동되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보장받고, 국가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간섭을 통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도와 덕이 구동되는 세상이다.
"거피취차"를 말 그대로 하면 '저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두터움(후)과 얇음(박), 꽃(화)과 열매(실)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노자는 얄팍한 것보다는 중후함, 화려 함보다는 내실에 집중하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노자는 자신의 껍질과 내실 없는 화려함을 버리고(去), 무게 감(厚) 있는 실속(實)을 선택(取)하라고 한다.
자신의 가치를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화려한 외적 수식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찾고, 지식과 학벌로 상대방을 누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 속에서 노자가 지적했던 혼탁한 세상을 보게 된다. 청정(청정)의 삶 속에서 내적 충만함을 만끽하고, 타자가 아닌 내면의 나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외부의 평가보다는 내실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노자가 꿈꾸었던 도덕의 세상이다. 박재희 교수의 글에서 만난 생각들이다.
'화려함을 버리고 소박함을 선택하라'는 "거피취차"를 잘 알지만, 선택이 쉽지 않다. 오늘 아침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좋은 선택이 좋은 삶이고, 좋은 태도가 좋은 길로 내 삶을 이끈다"는 문장을 만났다. 그녀는 선택을 아침에 하며 자신의 삶을 이끌라고 권유했다. 나도 동의한다. 그녀의 글을 공유한다. "세상 모든 선택은 심리적 비용을 요구한다.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고를지 선택하는 사소한 일조차 그렇다. 선택과 판단의 심리적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은 아침이 아닌 늦은 오후다. 상쾌한 아침과 피곤한 오후, 판사의 재소자 가석방 비율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콜롬비아 대학팀의 실험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하루를 시작할 때보다 마칠 때 정크 푸드를 선택하고, 충동 구매가 잦은 이유다.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의도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되는 대로 행동하는 모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중요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아침에 하는 공통점이 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결정의 숫자를 줄인다는 점도 그렇다. 내 경우 중요한 원고는 일어나자마자 쓰고, 허기가 질 때는 아몬드와 삶은 달걀 2개를 먹는다. 선택의 피로와 비용을 줄여 원고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백영옥)
그러니까 그녀는 충실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특히 아침을 ‘재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침을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정의하거나, ‘리셋 버튼’이라고 상상하면 매번 초심자의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몇 시에 일어나는 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의지력 충만한 아침에 몇 분이라도 ‘정말 중요하지만 하기 싫은 그 것’을 하라는 것이다. 그 하루가 쌓여 한 달, 일 년이 되면 삶이 되고 곧 태도가 된다. 좋은 선택이 좋은 삶이고, 좋은 태도가 좋은 길로 내 삶을 이끈다는 거다. 그래 나는, 오늘 아침 사진처럼, 신발 대신 맨발을 선택해 걷는다.
인성의 비교급/윤병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유성관광두레 #사진하나_시하나 #윤병무 #도덕경_38장 #거피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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